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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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꾼의 침묵

2021-05-26 (수) 조태자 /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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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에 미국에 와서 여러 주를 이사 다니다가 드디어 볼티모어시 북쪽에 있는 피닉스란 곳에 우리 집을 장만하고 정착하였다.
한국 도시에서 태어나 성장한 나는 자연계라든가 농사일을 잘 몰랐지만 새로 장만한 이 집에서 33년을 사는 동안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면서 사계절의 변화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는 순환계의 질서정연한 우주의 섭리에 눈이 띄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집에서 33년을 살았으니 피닉스는 미국에서의 나의 고향이다. 이곳은 볼티모어 시민들의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Reservoir)가 있는 곳이며 바다같이 넓고 깊은, 아니 이 호수는 사시사철 늘 푸른 물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주고 맑게 해 주었다. 피닉스로 가려면 필히 이 저수지 위의 다리를 통과해야만 하는데 다리 주위로 산재해 있는 숲과 그로 인한 사계절의 풍경이 가히 절경이다.
이 다리 양쪽에는 일년내내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망부석처럼 깊은 상념에 젖어 있는 것이 보인다. 낚시꾼들은 낚시를 하러 온 게 아니라 일상의 고민거리를 안고 문제 해결을 위해 미동도 하지 않고 먼 곳을 응시하며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비가 와도 그대로 서 있고 눈이 와도 요지부동으로 그 자리를 지키며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불어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낚시꾼들의 침묵은 언제나 고독해 보였고 연민의 정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이 저수지 위의 다리를 수도 없이 왕래 하면서 이렇게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모인 곳의 발원지가 어딘지 늘 궁금하였다. 산들이 있으면 계곡이 있고 그 계곡물은 강을 이루고 바다로 향해간다. 하지만 내가 사는 피닉스는 사방 몇 마일을 가도 평평한 대지이며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백두산은 모든 강의 발원지라는 말이 있듯이 히말라야에서 눈녹은 물은 서쪽으로는 인도의 갠지스 강을 이루고 동쪽으로는 동남 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으로 흘러간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은 하동을 지나 섬진강을 돌아서 서해안으로 빠져나간다.
어느 강이나 호수, 저수지는 언제나 처음 시작하는 미약한 발원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피닉스는 말 농장이 많은 곳으로도 유명한데 그것은 볼티모어시 Pimlic에서 해마다 열리는 말 경주 대회인 The Preakness 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 집은 이상하게도 전 주인이 딸기며 베리 종류를 많이 심어놓고 떠나버려 그 혜택은 오롯이 우리 가족이 보는 것 같아 그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만 든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따먹느라 좋았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관리가 부실해져 유명무실 하게 되어버렸다
이 집에 이사 와서 처음 보는 한국에서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열매, 작은 포도알 같기도 하고, 하여간 몇년을 방치해 두었는데 자꾸만 새들과 사슴들이 와서 먹는 걸 보고 나도 따 먹기 시작하였는데 알고 보니 블루베리였다.

세월은 흐르고 시간은 많이 흘러 갔다. 아이들이 제 갈 길로 떠난 집은 적막강산이었다.
나는 노인이 되었고 그 팔팔 하던 젊음은 지나간 시간의 유물이 되었다.
집을 관리하기가 어느새 부담이 되었고 특히 여름철이면 그 넓은 땅의 잔디 관리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알게 해준 이 집과 저수지와 동네를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정말 떠나고 싶진 않았지만 떠나야만 하는 현실에 전전긍긍 하면서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으로 노년의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여전히 옛집이 많이 생각난다.
초원 위의 말들과 시도 때도 없이 천방지축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 다리 주위의 사계절의 아름다운 변화무쌍한 경치들. 그 풍요롭고 순수한 추억을 오래도록 간직 하리라.

<조태자 /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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