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은 고비를 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조심스러워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얼굴이 웃는지 울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고 나는 마스크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웃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얼마 전에 태어난 손녀 얼굴의 웃음을... 인내의 시간이 지나고 엊그제 전송 받은 사진 속의 해맑은 손녀의 웃음을 보고 비로소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축복을 확인해 주시기 위해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배우지 않아도 바로 우는데, 울음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본능의 원초적 언어이다. 그러나 웃음은 다르다. 내가 기다렸던 웃음은 단지 귀여움의 상징이 아니라 발달 과정에서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예정일보다 5주 먼저 어려운 출산 과정을 통해 세상에 나온 손녀는 인큐베이터에 있었기 때문에 성장과 발달에 혹시나 문제가 없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다. 성장 이정표 중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웃을 줄 아는 것인데, 아기들은 약 2달 정도가 되었을 때 사회적 웃음(social smile)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전까지 가끔 나올 수 있는 생리적 반사에 의한 웃음과는 다른,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게 반응하는 웃음을 말한다. 상대에게 웃어 보이기 시작하는 이 한 장면으로서 뇌의 여러 부분이 잘 성숙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앞을 보는 시력이 있다는 뜻이고, 얼굴이 의미가 있는 물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며, 자기 스스로 웃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웃음이야말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사회생활의 시작이며 성숙의 시초라고 말할 수 있다.
성장하는 아기들은 일반적으로 웃음을 보이는 외에도 사람들을 응시하거나 목소리를 주목하는 등의 활동을 보인다. 하지만 때가 되어도 잘 웃지 않는 아기는 자폐증을 걱정해보아야 한다. 영어로 ‘autism’ 자폐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자신’을 뜻하는 ‘autos’에서 유래한 말이다. 신경발달 장애로 여겨지는 자폐 증상이 있는 아기는 얼굴을 마주보는 것을 싫어하고, 인간 사회의 상호 작용을 이해하는 것에 굉장한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 자라면서 자폐 증상이 있는 아이는 다른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남들과 소통하기 어려워하면서 자신의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자폐성을 가진 아동은 특별한 관심을 갖고 돌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동 정신분열증으로 이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현실성을 잃어버리고 ‘자기 고립’이란 질병에 걸리게 된다.
우리는 팬데믹의 고립에서 겨우 빠져 나올 즈음에 다시 각종 혐오와 갈등이란 쇠사슬에 묶여있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흑백 갈등, 아시안 혐오에 덧붙여, 빈부의 갈등은 심화되고 있다. ‘자기 고립’이란 방에 갇히면서 이웃을 잊어버린 결과가 아닌가? 1992년 4월 29일 LA폭동이 떠오른다. 개업을 막 시작하고 있었던 나는 폭동으로 사업체를 잃고 실망하여 자살한 환자의 소식을 들어야 했다, 자살 직전 마지막 병원 방문 때 살짝 비쳤던 자살의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위로의 말을 드리지 못한 가슴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 또 가게에서 침입자의 총탄에 세상을 떠나신 환자분도 있었다. 미리 운명을 알고 있었던지 그분은 유난히도 마지막 내원 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셨다. 우리 이민자들은 분하고 억울하였지만 울음을 꿀꺽 삼켜야만 했다.
시간이 갈수록 미주 이민자에게는 인종적 갈등의 두려움뿐 아니라 현실 삶의 무게도 적지 않다. 살아가기가 녹록치 않은 미국 이민 현실에, 연세가 많아지는 부모님들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 문화적 차이에 따른 자녀들과의 거리감으로 중압감은 더해간다. 아메리칸 드림은 고사하고 지나친 개인주의로 각박해지는 분위기에 때때로 울고 싶은 심정이다. 점점 자기 고립에 빠지는 느낌이다. 자유인처럼 지내고 있지만 사실은 마스크 밑에서 웃음을 잃고 중압감과 잘못된 욕망과 신념, 증오 등의 쇠사슬에 점점 묶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진다.
웃음은 걱정과 두려움을 뛰어넘게 해준다. 웃음은 원초적 감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며 성숙해가며 만들어가는 것이다. 해맑은 웃음을 시작하면서 가족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아이처럼, 나를 뛰어넘어 다른 이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갖는다면 증오와 혐오에서 빠져나와 함께 웃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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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내과의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