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첫인상은 인간과 자연의 한판 승부였다. 맨해튼의 수많은 마천루 군락이 중력에 저항하며 버티고, 그 아래 낡은 철로를 따라 전철이 이동하는 모습이 힘겹고 위태로워 보였다. 점심시간에 주문형 식당에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지만, 계산대에서의 거래는 1초를 넘기지 않는다. 뉴요커는 도시가 집이고 학교이며 뮤지엄이고 식당이다.
이렇듯 외부 생활이 일상인 이 도시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바로 COVID19가 발병한 것이다. 재택근무가 공식적으로 시행된 것이 2020년 3월 중순이니 이미 1년 2개월이 지났다. 지난 1여 년의 도시는 그 뉴욕이 아니었다. 봉쇄 조치란 미명 아래, 모든 문화행사와 업무가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바뀌었고, 이동과 통행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사회로부터 단절된 공간은 종종 영화에 등장한다. 레니 에이브러햄슨의 ‘룸’에서 성폭행당하여 출산한 아들과 함께 밀폐된 좁은 공간에 갇혀 살아가는 모자가 묘사되었다. 봉준호의 ‘기생충’에서는 지하 장소와 같이 의도된 단절 공간을 스스로 선택한 인간을 해충으로 은유하기도 했다. 이 장소들과 감옥의 공통점은 제한된 장소와 시간의 억압성에 있다.
만약, 나의 서민 아파트에 시공간을 제한한다면 감옥과 무엇이 다른 걸까? 집의 주 역할이 잠을 자는 장소인 뉴요커에게 이런 상상은 끔찍하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나의 아파트는 프리워(prewar) 워컵(walk-up)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지어진 5층 미만의 아파트란 의미이다. 워컵 중에 19세기에 빠른 속도로 늘어난 이민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공모를 통해 고안된 빈민 공동주택인 테너먼트가 있다. 이는 평면이 길쭉한 덤벨의 형태를 가졌기에 덤벨 테너먼트(Dumbbell Tenement)라고도 불렸는데 1879년부터 1901년까지 건설되었다. 초과밀, 공기 순환과 위생 등의 문제로, 뉴욕의 주택 법규는 이 아파트를 마침내 금지시켰다. 하지만 과밀한 뉴욕의 특성상, 슬럼가 정리 정책은 이 주거 유형을 없애지 않고 보존하거나 개량하여 현재에도 수천 뉴요커들이 생활하고 있다. 나의 옷장이 좁은 쪽문으로 연결되고 샤워기는 튜브와 직각으로 부착된 개량 흔적과 아파트의 평면은 테너먼트와 흡사하다.
바이러스의 공포는 누군가 신발을 복도에 벗어놓게 만들었고, 많은 이들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온갖 종류의 음식 냄새가 계단과 복도를 지나 집안까지 채워진다. 환기시설이 없는 탓에 현관과 계단 창을 열어야 공기가 제대로 순환하는데, 겨울에는 창문을 닫기 때문에 더욱 심하다. 아래 위층 어느 유닛 거주자가 대마를 애연하는지, 어디에 인도인이 사는지, 옆집의 음식 선호가 무엇인지, 자연히 알게 된다.
외부 활동이 제한되니, 운동을 실내에서 하게 돼서 소음이 심각하다. 위층 여인이 어떤 음악을 듣고 언제 운동하며 잠자리에 드는지 대략 알게 된다. 방음이 열악하고 바닥판이 나무라서 걸을 때 소리가 난다. 뉴욕에서 싱글들은 대개 비용을 아끼려 공유(share)로 살아가는데, 이 시기가 어떠할지 자못 궁금하다. 건축가들은 유행처럼 포스트 코비드 시대 집의 유형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기 생활은 생각보다 산뜻하다. 팬데믹은 사회를 폐쇄시켰지만 이웃을 개방하였다. 옆집에 대한 무관심은 사라지고 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책은 일상의 작은 행복이다. 생필품마저 배달하게 되니, 아파트 계단을 수시로 오르내린다. 일정한 시간에 줄넘기를 하는 사람, 현관에서 담배 피우는 할머니, 만나기 어려웠던 건물주, 그리고 관리인.
눈인사로 익숙한 얼굴은 일종의 동질감을 만들어 포근하다. 복도에 어지럽게 놓여있는 신발들은 그 유닛의 정체를 알려준다. 삭막하던 복도에 간이 선반이 놓이더니 손 소독제와 화분이 자리 잡고 잡동사니도 놓여있다. 그 모양새가 한국의 달동네를 닮았다. 코로나 시대의 뉴욕 서민 아파트에는 이웃과 마음을 연결하는 커뮤니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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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대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