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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최의 무용과 삶] 발레로 찾는 또 다른 나

2024-11-22 (금) 진 최 한미무용연합회회장 / 진 발레스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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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백조에서 치명적 팜므파탈 살로매까지”

내가 초등학교시절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으로 영국 로열 발레단에 내한공연이 있었다. 나는 엄마 손잡고 공연장을 찾았다. 프리마돈나 마고트 폰테인의 스완 공연을 처음 보았고 그때 느낌은 마치 온몸이 전기에 감전된 기분이었다. 청순 가련한 한 마리 백조 솜털 같은 손동작, 우아하고 기품 있는 표정 쟁반 같은 화려한 발레 뜌뜌 모든 것이 내가 원하고 꿈꾸던 환상의 세계였다. “발레리나 너의 꿈을 이루어질 거야” (Your ballerina’s dream will come true) 공연이 끝나고 마고트 폰테인에게 직접 받은 사인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발레가 나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아 몇 날 며칠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발레와 평생 함께 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날을 기억하면 지금도 가슴이 꽁꽁 뛴다.

발레는 무대 위에서 또 다른 세상과 삶을 경험하게 해주는 창이다. 춤을 통해 내가 살아보지 못한 다양한 인생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여정에는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단순한 캐릭터가 아닌, 때로는 한없이 우아하고 때로는 매혹적인, 이중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내가 발레를 사랑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양면성’과 ‘다양한 성격’을 마주하면서 새롭게 발견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는 순수하고 깨끗한 백조의 모습으로 우아함의 절정을 보여주지만, 같은 작품에서 오딜은 음침하면서도 매혹적인 블랙 스완으로 변신한다. 이 둘은 양면성을 극대화하며, 하나의 몸 안에서 두 영혼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춤을 통해 사랑과 갈등을 표현한다. 인간 내면에 선과 악을 일인이역으로 동시에 표현하며 고고한 미학을 담아 내기도 한다. 또한, 때로는 사랑에 목숨을 바친 영혼, 지젤 같은 인생을 경험하기도 한다. 지젤은 배신과 아픔 속에서도 사랑을 택한 캐릭터로, 그 춤에는 사랑의 비애와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반면, 살로메나 카르맨 같은 캐릭터로 변신할 때는 전혀 다른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살로메는 치명적인 유혹을 무기로 삼아 남성을 유혹해 파멸로 이끄는 팜므파탈의 매력을 표현하는 캐릭터이다. 카르맨 역시 열정과 도발의 상징으로, 자유분방함과 관능미가 가득 담긴 캐릭터를 통해 억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처럼 발레는 때로는 파괴적이고 도전적인 면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없는 성격을 마치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고, 무표정한 포커페이스처럼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숨긴 채 상대를 매료시킨다. 이런 캐릭터를 표현할 때면, 그 속에서 살아보지 못한 인생의 한 조각을 몸으로 경험하면서 평소의 내 모습이 아닌 전혀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된다.

발레는 단순한 움직임의 춤이 아니라 하나의 인생을 담은 이야기로 스스로와 타인의 감정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내며, 춤의 즐거움과 삶의 철학을 함께 선사해 준다. 어릴 적부터 발레는 나의 인생의 일부이자, 단순한 춤을 넘어 새로운 삶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였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느끼는 그 긴장감과 떨림은 단순히 동작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그 순간 새로운 캐릭터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는 설렘이 담겨 있다. 마치 발레 무대가 하나의 거울처럼 우리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모습들을 비춰주는 것처럼, 발레를 통해 또 다른 인생을 사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발레로 만나는 또 다른 나’ 이 여정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모든 색채를 조금씩 알게 되며 그 무대 위에서 진정한 나를 찾으며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진 최 한미무용연합회회장 / 진 발레스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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