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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제사

2021-05-12 (수) 박성한 / 프레드릭스버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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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국 신경내과 칼럼

어머니 제사를 내가 주장하여 4년 전부터 미국으로 모셔 왔다. 마침 양력으로 치면 5월초가 된다. 올해는 어머니날과 겹쳤다. 어머니 제사 날을 한 달 전부터 준비했다.
제사를 마치고 와이프에게 그릇은 내가 치울 테니 쉬라고 했다. 제사 후 59개의 그릇이 모였다.
내가 제사를 가져오자고 해서 은근히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눈치를 살펴도 그렇게 싫은 표정은 보이지 않아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거지를 하고나니 새벽 3시 03분이다. 어머님의 영혼이 미소 짓는 기분이다. 마음이 가볍다.
여자들이 왜 제사를 버거워 하는지 이해가 간다. 사실 제사는 음식하기도 바쁘지만 사람들이 모이기에 접대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우리 식구끼리 해도 음식 그릇이 이렇게 모이니 말이다.

나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시작하게 됨에 따라 고향을 떠난 방랑자 인생을 걷게 되었다. 그 방랑인생이 나이 먹어서는 미국 워싱턴까지 오게 됐다.
어머니와의 추억은 어려서 치맛자락 붙잡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제사에 가던 생각이 제일 난다. 어머니는 머리에 쌀을 이고 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갔다. 외갓집에 가면 도토성이(우리 마을 옛 이름)에서 왔다고 외삼촌들이 반가워했다.
지금 생각으로는 떡쌀을 어머님이 이고 와서 떡을 할 수가 있었던 같다. 저녁 12시에 제사를 지내기에 그사이 온갖 지내온 얘기로 시끄럽다. 짓궂은 외삼촌들은 우리 또래 애들에게 씨름을 시키며 즐거워했다.


제사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하여 그리고 미국에 있는 자식들, 손주에게 이 전통을 알려주고 싶다. 내 손주가 왜 절을 하느냐고 묻는다. “My mom memorial day”라고 했다.
내가 객지로 떠돌면서 난 항상 어머니의 걱정거리였다. 미국에 올 때도 당부가 거기 가서 절대로 세탁소는 하지 마라 였다.
왜냐하면 우리 시골 옆 동네에 이민 간 큰 형님 친구가 있었는데 그분이 미국에서 세탁소 한다는 소문이 났다.

우리 어머니 생각에는 왜 미국까지 가서 코쟁이들 속옷(어머니 표현으로는 똥 빨래)이나 빠느냐는 것 같았다. 어머니 생각에는 내가 한국에서처럼 대기업체에 다니는 어엿한 화이트 칼라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그 당시에 이민 오면 그로서리, 세탁소, 음식점. 이발소 등 스몰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기술직이 일부분이었다. 기술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다가 먼저 온 친구의 조언(?) 으로 그로서리를 하게 되었는데 그게 지금 생각하면 실수인 것 같다.
우리 형수가 나보고 미국 가면 옆 동네 큰 형님 친구 좀 찾아보라고 했는데 그 친척이 내가 사려고 하는 그로서리 주인이었다. 토종 충청도 말로 “동생 잘 해줄 게 사”라고 해서 샀다.

위험지역이어서 내 성격상 맞지 않아 다른 비즈니스를 찾다가 세탁소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미국 가면 세탁소를 하지 말라고 했는데.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당시에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하늘나라에서도 꾸중하실 것 같았다. 그래도 세탁소는 고생스럽지만 수입은 그로서리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이제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왜 어머니 앞에서는 철없이 속만 썩였을까 하는 거다. 그 아쉬움만 남아 있다. 이루어질 수는 없으나 가끔 꿈에서라도 어머니를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런 생각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더하다. 이 세상에 어머니의 사랑이 없다면 세상은 이미 종말이 왔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사랑의 공통점은 어머니일 것이다.

<박성한 / 프레드릭스버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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