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닮고 싶은 장례문화

2021-05-10 (월) 유영집 / 조종사, MD
크게 작게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며 살아 간다. 특히 가족은 혈연관계로 좋은 기억이나 나쁜 기억이나 다 안고 살아가는 집단이다. 그 중에서도 부모나 자식에 대한 이별의 슬픔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을까? 어렸을 적 시골에서 어른들이 돌아가시면 집에서 장례를 지냈다. 대개 3일장을 치뤘는데 3일동안 모든 동네 사람들은 하던 일들을 멈추고 마당에 장작불을 피우며 밤새도록 유가족을 위로하고 장례를 돕는 일들을 했다.

장사 전날밤에 시신에 대한 염을 하였는데 그때 가족들이 다 모여 떠나 가시는 고인의 마지막 얼굴을 보며 처음부터 끝까지 염하는 과정을 지켜 보며 통곡하였다. 나도 어렸을 때 할머니의 장례절차에 참석 했는데 얼마동안은 무서워서 밤에 돌아다니지 못한 것 같다.
거기에다 장례후 ‘지청’이란 것을 만들어 일정기간 고인의 영정사진과 촛불을 밝혀 놓았으니 어린 마음에 겁도 많이 냈었다. 특히 밤에 밖에 있는 화장실을 가려고 하면 많이 망설이곤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수십년이 지났지만 그때 ‘지청’ 앞을 지나가는 것을 연상하면 무서운 생각이 들곤 한다.

미국에 와서 몇번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나에게 장례문화를 다시 생각해 보는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시간이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종교행사와 더불어 진행 되었는데 집례자에 의한 평소 고인의 신앙심에 대한 말씀과 사회자에 의한 고인에 대한 약력과 이어서 자손들을 키워 주신 할머니와의 따뜻했던 기억을 이야기하며 회상하는 것을 보고 고인에 대한 사랑이 묻어 나오는 시간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할머니의 얽힌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는 동안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로부터 웃음을 자아내게도 했다. 이어서 또 다른 손녀는 할머니께 바치는 곡을 선사했는데 “You raise me up”을 불렀다. 그 노래를 부르는 동안 장내는 엄숙했지만 나는 가슴이 벅차 오름을 느끼게 되었다.
장례절차가 끝나고 참석자들과 고인의 마지막 뷰잉서비스가 있었는데 나는 순간 망설이게 되었다. 그 옛날 할머니와의 이별 절차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억 때문이었다. 물론 한국도 장례문화가 조금씩 바뀌어 사전 장례사에 의해 수의를 입힌 상태로 고인을 대면 할 수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눈물이 가득한 슬픔으로 진행되고 있다. 나도 미국에 오기전 장례식장에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뤘지만 추억 보다는 슬픈 기억 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뷰잉서비스를 하는 동안 흐느끼는 사람이 없이 평온했고 막상 고인을 뵈었을 때 살아계셔서 잠이 들어 있는 모습으로 다가와 깜짝 놀랐다. 또 한번은 미국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중 집에서 잠을 자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청년의 장례가 있었다.
장례절차가 끝난 뒤 주일, 교회 예배 후 미국을 떠나면서 한국에서 오신 부모님의 인사 말씀이 있었는데 “저에게 아들을 보내 주셔서 기쁨을 주시고 또한 때가 되어 데려가신 이도 하나님이시라” 면서 “장례절차에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듣고 그분에 대한 성숙하고 깊은 신앙심에 놀랐고 지금도 가슴을 울리게 한다.
한국도 장례문화가 미국처럼 고인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시간으로 발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영집 / 조종사, MD>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