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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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꿈나무들

2021-05-09 (일) 윤영순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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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결혼 50주년을 맞고 보니 흘러간 세월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매 순간 인생의 주인공은 나였는데 어느 사이엔가 그 자리에는 내 자식이 있었고, 지금은 사랑스런 손녀들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있다.
봄이 되자 창밖의 앙상한 가지에는 하루가 다르게 연초록 잎사귀가 앞 다투며 잎을 살찌운다. 흔히 어린아이 때가 사랑스럽고 예쁘듯이, 모든 나무들도 야들야들한 여린 잎이 돋아날 때쯤이 가장 풋풋하고 신선하다. 언젠가 손녀에게 무언가 기념이라도 될까 싶어 사과씨를 물 속에서 한동안 키워 보았다.

봄이 되어 흙 속에 뿌리를 심었더니 삼 년이 지난 지금 제법 어린 나무로 모양새를 갖춘다. 빨간 사과를 먹고 예쁘게 자라라는 할머니의 깊은 뜻을 말했더니 작은 손녀도 언니처럼 내 사과나무를 갖고 싶단다.
올해 또다시 싹을 키운 작은 손녀의 사과나무 몇 개가 새싹을 틔웠다. 무슨 신기한 발견이라도 한 듯 손녀들이 카톡으로 컵 물속에 사과씨를 담은 영상을 보내왔다. 할머니를 따라 하는 손녀들이 사랑스럽고 대견하다. 이 다음 열매가 빨갛게 익어 갈 때쯤 할머니를 생각하며 사과를 따먹을 손녀들을 상상해 본다.

세월의 흐름을 알려주듯이 우리 집 장식장 위에는 빛 바랜 2007년도 달력이 놓여있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우리에게 큰아들이 만들어 준 달력 속 12개의 사진 한 장 한 장은 달마다 제 식구들의 사진을 넣어서 탁자용으로 만든 걸작품이다. 그 속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찍은 큰 손녀의 어릴 적 사진들이 많아 지나간 세월을 추억하며 들여다보게 된다.
종종 아빠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오는 큰 손녀가 우리 집을 찾아 올 때면 근처 초등학교 놀이터에 가서 그네타기, 미끄럼틀 타기, 시소놀이도 하지만, 토끼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고사리 손으로 토끼풀을 뜯어 먹이는 모습이랑, 작은 키로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 새장 속 새들을 올려다보는 눈이 큰 앙증스런 큰손녀였다.


달력 속 사진을 보니 그때가 또렷하게 떠오른다. 이제는 고등학생으로 훌쩍 자랐으니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했던, 오직 사진 속에서만 존재하는 3, 4세 때의 제 모습을 기억이나 할런지.
“여보, 오늘 날씨도 좋은데 우리도 먹을 겸, 이태리 피자가게에 가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치즈 피자와 아들 내외가 좋아하는 크랩케익(crab cake)을 사서 갖다 줍시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자주 목격 한 이웃 친구 존과 메리 부부가 남편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피자 배달 할아버지 (pizza delivery gran’pa)라고. 퍽이나 부러운 눈치다.

매일 마주치는 사소한 일 한 가지라도 손녀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은 충동이 일면, 시도 때도 없이 머리 속에서 글감이 맴돌아 나온다. “오늘이 내일보다 젊은 날”이라는 노랫말처럼 그나마 정감이 넘치는 조용한 노년의 모습을 아련하게나마 손녀들 기억 속에 남겨주고 싶다.

<윤영순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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