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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에세이] 분노의 미소

2021-05-06 (목)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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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절대로 내게 대놓고 화를 낸 건 아니다. 근데 웬일인지 뒤돌아서 생각하니 우쒸이~ 김샌다. 그녀는 웃는 표정으로 우아하게 안녕을 하고 떠났지만 남겨진 내 기분은 찝찝하다. 개운찮은 감정문제를 꺼내놓고 말하려 하면 그녀는 언제나 나중으로 미루거나 덮어버린다.

이런 경험이 있다면 당신은 바로 ‘분노의 미소’에 말려드는 중이다. 아니, 반대일 수도 있다. 바로 당신이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일지도.

‘분노의 미소’(Angry Smile)는 심리학에서 ‘수동공격’이라고 이름 붙인 좀 독특한 성격 패턴이다. 수동공격(Passive-Aggressive)은 정신질환 편람에 몇 번이나 올라갈 뻔 하다가 탈락된 전적이 있다.


90년대 전문가들 사이에서 환자의 저항이나 툭하면 내뱉는 비관적 표현들, 숨겨진 공격성을 병리화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분분했다. 하지만 부적절한 행동, 지배적이거나 비관으로 치닫는 행동을?영구히 유지하는 환자를 빼곤 ‘질환이 아니다’에 결국 합의했다.?

본래 대부분의 성격장애가 ‘당사자는 자기 문제를 모르고, 당하는 사람은 괴롭고’가 특징. ‘분노의 미소’ 역시 본인보다 주변의 가족들이나 친구, 직장 동료가 힘들다.

이들은 갈등 장면에 주로 삐지거나 입을 다물어버리거나 뒤로 물러서는 전략을 취한다. 분노를 직접 표현하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거라는 굳은 신념 때문에 분노를 돌려서 표현하거나 정직한 소통을 거부한다. 이들이 자주 쓰는 말은 나 화 안났어, 난 괜찮아, 아무려면 어때 등이다. 말 속에는 억압된 적개심이 깔려있다. 이런 식의 ‘수동 공격’을 오래 당하다보면 심한 정신/정서적 피로감을 느낀다.

수동공격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견디다 못해 폭발 지경이 되는 것을 바라보며 평온을 유지한다. 때로는 “왜 그러십니까?”라며 자신의 공격성을 가장하는 기술을 발휘하기도 한다. 상대방이 오히려 ‘내 반응이 지나쳤나?’ 자책에 이르는 것을 볼 때 쾌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유튜브에 영상이 올라 공분을 샀던 유명 호텔 청소부의 세수수건으로 변기 닦기, 서비스센터 직원의 지나치게 공손한 말투와는 달리 결국 소비자의 요청을 거절하고 승리의 V사인 만들기, 진실된 감정 교류를 회피한 채 “좋으실 대로 하세요”라고 말한 그날 저녁, 시어머니의 식탁에 먹다 남은 반찬 뒤집어놓기, 애인과 헤어져 슬퍼하는 동료에게 “괜찮아, 너처럼 주근깨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있겠지 뭐”라고 말하기, 남편에게 쌓인 불만을 아픈 척 돌아눕기로 표현하기, 직장 상사가 시킨 일의 부당함을 표현하는 대신 질질 끌며 계속 미루기, 좋은 정보를 절대 공유하지 않고 남들이 몰라서 헤매거나 먼 길 돌아가는 것을 보며 속으로 즐기기, 부모가 “내가 빨리 죽어야지”라고 말해서 자녀를 불편하게 하기…….

사람은 누구나 공격적일 때도 있고 수동적일 때도 있다. 동시에 상대방의 공격성을 눈치 챌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수동공격적인 행동이나 말은 상대를 오해하게 한다. 그 뒤에 교묘하게 숨겨진 분노 때문이다. 분노는 언젠가는 상대에게 암시된다. 이 암시를 직면하는 사람은 혼란스럽고 아프다.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낮다. 어린 시절 애착관계 실패 경험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울장애, 불안장애, ADHD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주변 누군가 ‘분노의 미소’의 주인공이라면 전문가와 상담을 받도록 하는게 가장 건강한 방법이다. 본인의 성향이 그렇다고 여겨진다면 내면에 깔린 분노와 좌절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게 좋다. 마음은 그렇게 겉부터 속까지 여러 결이다. 상처 주고 상처받기 쉬운 우리, 마음은 항상 ‘FRAGILE’ (파손 주의)이다.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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