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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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다는 게

2021-05-03 (월) 서옥자 / 한미 국가 조찬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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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아는 지극한 진리, 인생은 빈 손으로 왔다 빈 손으로 간다는데. 그런데 그 상식적인 진리를 내 자신이 근래에 실천하려니 자아 봉착, 고민, 우울의 늪에 빠져버렸다. 보편적 상식도 자신이 실천하려니 어려워 질 때가 있나보다.
머지 않아 정리하며 삶의 터를 옮겨 볼까 하며 집 정리를 하려고 버릴 것들을 돌아보았다. 얼마나 버릴 것들이 구석 구석 쌓여 있는지. 옷들은 쉽게 처분할 수가 있기에 우선 책장에 나열된 책들 부터 둘러 보았다.

그런데 미국 와서 힘들게 공부하면서 구입한 책들 하나 하나, 그리고 서울 방문할 때마다 싸들고 온 보석같은 내용의 책들, 이런, 저런 이유로 어느 하나 버리고 싶은게 없었다. 억지로라도 몇 권씩 얼마간 리싸이클 통에 매 주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감정은 통제 불능이 되어버렸다. 나의 혼신이 담기어 있는 두꺼운 수업, 강의 노트, 나머지 책들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마치 나의 분신을 버리는 것 같은 상실감, 아쉬움 플러스 나이 들어가면서 주위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는 결단력 부족때문에. 나는 베이비 부머 세대라서인지 온라인 책들을 즐기지 않는다. 또한 온라인으로 오래 읽으면 눈이 건조해지고 피곤해지기도 하는 이유도 있어서이다.

책장을 넘기며 책에서 묻어나는 냄새도 음미하고, 또한 성경을 읽을 때도, 형광 펜으로 하이라이트하며 읽어야 은혜가 되는 것 같은 습관도 있기에.
그런 상황에 머리가 더 아파졌다. 내 인생의 파노라마가 온통 가득차 있는 큰 박스들 말이다. 발랄했던 20대, 홍콩에서 활동을 시작으로,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커리어 워먼, 그리고 워싱턴에서 오랜 세월 정신대 문제의 활동 등등의 신문 기사들, 사진 스크랩 해놓은 앨범들, 매거진들이 담겨있는 박스들, 지난 수십 년,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삶의 역사 이야기다.


한국, 미국 대통령상, 주지사, 국회 등등에서 받은 수많운 상들. 내 나름대로 보람스러웠고 자랑스러웠던 그 상패들, 그것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것이 주는 의미를 내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죽을 때에 다 짊어지고 가면 얼마나 좋으련만, 꽝이다. 성경에 나오는 전도자의 말대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다.
내가 전에 미국 대학교에서 노인학(Gerontology)을 강의하던 내용들을 문득 생각하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 자신이 학생들에게 가르친 내용은 립 서비스(lip service), 학문적, 피상적인 지식의 외침일 뿐이었다. 객관적, 주관적인 관점, 체험은 많이 다를 수 밖에.

천하의 영웅, 유명인들도 다 모든 것 내려 두고 떠났다. 별 볼일 없는 내 자신이 무어라고 이렇게 바둥대며 집착하는 모습을 보며 언제나 철이 들까 안타까웠다. 'Less is more (적은게 많은 것이다).'
하긴 세상 소유 많으면 무엇하겠나. 한국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은 감옥소에 가 있고, 최고 권력의 대통령들도 차례로 감옥소에 가는데. 트럼프, 바이든은 70대 후반에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서 세계를 이끌어 가면서, 게다가 80대 초반에도 재선에 다시 나오겠다고 큰 소리친다.

최근 윤여정은 74세에 오스카 상을 받으며 우리에게 새롭고, 싱싱한 용기를 주고 있는데. 그런데 그들도, 우리도, 나도, 이 세상에 갖고 떠날 게 하나도 없다. 오늘 내게 주어진 새로운 아침을 열으며 잠시 소유하고, 빌려쓰다 놓고가는 소위 ‘ 나의 것들’, 하나, 하나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삶의 단순한 것에서 기쁨을 누리자 다짐해본다.
푸른 5월의 달, 지금이라도 펑펑 솟아오르는 에고(ego)의 욕망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도 바울의 믿음을 바라보며 도전해보려고 한다.

<서옥자 / 한미 국가 조찬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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