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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은 이제 그만,‘인간’을 보자

2021-04-16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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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 왔을 때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땅을 가지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기도 합시다’ 하기에 우리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보니 우리는 성경을 가졌고 그들은 땅을 가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즈먼드 투투 성공회 대주교가 한 말이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 종식을 위해 투쟁한 공로로 198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그는 1994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취임하자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이끌며 새로운 남아공 건설에 앞장섰던 종교지도자/비폭력 민권운동가이다.

그의 성경과 땅 이야기는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정곡을 찌른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등 지구상 거의 전 지역이 유럽 정복자들의 침략과 약탈로 고통 받은 게 수백년, 그 수난의 역사를 그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했다.


기세등등하던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는 20세기 중반 막을 내렸다. 하지만 21세기인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괴롭히는 잔재가 있다. 인종을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식으로 나누고, 백인은 우월하고 유색인종은 열등하다는 인종주의다. 생물학자들은 근거 없는 허구의 개념이라고 강조하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인종적 편견은 요지부동이다.

지난 12일 LA 타임스 오피니언 면에는 LA의 클라우디아 최씨가 보낸 독자편지가 실렸다. 미국에서 아시안에 대한 증오의 역사가 너무 길다고 지적한 그는 이를 막을 수 있도록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아태계 차별 규탄에 동참하고, 아시안 증오범죄 신고를 돕는 기관이나 관련 정보 및 카운슬링 제공 커뮤니티 프로그램들을 후원하며, 흑인 라티노 성소수자 등 다른 억압받는 이웃들을 위해서도 나서줄 것을 당부했다.

그가 아시안 증오범죄 규탄에 앞장서게 된 것은 그 참담함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중순 부친상을 당한 그는 아버지 장례식 며칠 후 편지 한통을 받았다. 남가주 실비치의 은퇴촌, 레저월드에 사는 어머니 영 최씨 앞으로 온 편지였다. 내용은 섬뜩했다. “(네 남편이 죽었으니) 레저월드에서 참고 견뎌야 할 아시안이 한명 줄었구나. 빌어먹을 아시안들이 우리 미국인 커뮤니티를 점거하고 있다. … 당장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증오에 찬 편지였다.

개인적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아시안이 이웃에 사는 게 싫어서 이 정도의 독설을 뿜어낸다면 그 사람의 내면에는 얼마나 지독한 인종차별이 도사리고 있을 것인가. 편지라기보다는 비수에 가깝다.

‘인종’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은 400여년 전이다. 호모사피엔스로서 20만년, 농업을 하며 정착생활한 지 1만2,000년 인류역사에 비하면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전에 없던 ‘인종’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힘 있는 자들의 필요 때문이었다.

서구 식민주의가 본격화한 16세기, 낯선 대륙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잠시 고민을 했다고 한다. 피부색 다른 원주민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과학이었다. 당시의 허술한 생물학, 인류학 등이 총동원되어 이론을 만들어냈다. 백인은 우월하고 흑인 등 유색인은 열등하며,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지배하는 게 신의 섭리라는 논리였다. 원주민들을 악랄하게 착취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는 편리한 이론이 탄생한 것이다. ‘인종’ 개념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산물이다.

미국의 고질적 문제, 인종주의에 대한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지난해 5월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 이후 BLM(흑인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이 젊은 층 중심으로 공감대를 넓히며 범사회적 운동으로 자리 잡았고, 올해 들어서는 아시안 혐오범죄 규탄대회가 확산되고 있다.


때가 무르익은 걸까. 아시안 증오범죄에 강력 대처하겠다고 바이든 행정부와 연방의회가 나서고, 각 지방정부들도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침묵하던 아시안 커뮤니티의 전에 없는 강경한 태도 그리고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 등 각계에 포진한 아시안 정치력 덕분일 것이다.

유가족을 충격에 빠트린 편지사건 이후 레저월드 주민 500여명은 아시안 혐오범죄 규탄대회를 열었다. 대략 8,000명인 주민의 대부분은 백인과 아시안. 인종문제는 주로 백인의 아시안 비하였다. “코리안 싫다, 한국으로 가라”거나 “코리안, 베트남인들이 와서 세탁실이 지저분해졌다” 등의 혐오 발언이 심심찮게 있어왔다.

인종혐오 대처법은 첫째 잘못을 단호히 지적하는 것, 둘째 서로 자주 어울려 편견을 녹여내는 것. 이번 규탄대회 후 백인들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고 한인주민들은 전한다. 아울러 레저월드 한인회는 다문화 음악회, 패션쇼, 시식회 등 다민족 행사들을 준비 중이다.

미국이라는 큰 공동체의 대처법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 ‘인종’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흑인이 열등해서 노예가 된 게 아니다. 힘이 없어 노예가 되고 나니 검은 피부가 열등의 징표로 둔갑한 것이다. 인종이 아니라 인간, 그 개개인을 보아야 인종문제는 해결된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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