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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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를 생각한다

2021-04-15 (목)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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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소녀인 완이화는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얀마 난민 가수다. 한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그는 팬클럽도 결성돼 있다. 유튜브에 올려진 클립은 대부분 조회수가 수 십만회, 200만회에 근접한 것도 있다. 완이화가 그의 모국어로 부르는 ‘나는 하나의 집을 원해요’와 한국 가요 ‘바람의 노래’ 접속곡 등을 들으면 다른 가수와는 또 다른 애절함이 느껴진다는 팬이 많다.

완이화는 미얀마 중에서도 카렌족 출신이다. 태국 접경 지대에 모여 사는 카렌족은 다소 특이한 소수민족이다.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 대다수가 기독교 신자인데다, 미얀마가 독립 국가가 되기 전부터 줄기차게 분리독립을 주장해 왔다. 당연히 핍박의 대상이었다. 카렌족들은 요즘 미얀마 군의 공습을 피해 밀림 속이나 태국 국경으로 몰리고 있지만 국경은 차단돼 있다.

버마에서 국호가 바뀐 미얀마는 많이 알려진 나라가 아니다. 한국인에게는 아웅산 폭탄 테러, 노벨평화상 수상자 아웅산 수치, 한국 축구가 동남아권에 머물던 때를 기억하는 세대라면 나름 강세였던 버마 축구 정도가 생각날지 모르겠다. 요즘은 중국보다 싼 인건비 때문에 봉제, 의류등 일부 임가공 업체가 진출해 있다.


미얀마 커뮤니티에서는 재미 미얀마인을 30여만명으로 추산하지만 10년 전 센서스에 공식 집계된 미야마인은 10만명이 좀 넘는 정도. LA근교에서는 몬터레이 팍, 로즈미드, 샌 개브리엘 등에 많이 분포해 있다. 식당 등 미얀마 업소가 가비 애비뉴(Garvey Ave.)를 따라 더러 들어서 있으나 월남 국수나 태국의 똠얌꿍 같이 알려진 음식도 없어 아는 사람만 알 뿐이다.

미주의 미얀마어 신문은 LA의 카노가 팍에서 나오는 ‘미얀마 가제트’가 유일하다. 매월 한 번 32페이지로 3,000부가 발행돼 치과병원, 부동산 사무실, 사찰 등에 배부된다. 애리조나, 뉴욕, 인디애나의 포트 웨인 등 미국내 다른 미얀마인 지역에는 별도로 우송되고 있다고 한다. 자체 커뮤니티나 단체 활동도 미미해 아시안 아메리칸 중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소수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미얀마 쿠데타 소식은 그야말로 외신일 뿐이다. 군경의 총에 맞아 사망한 비무장 민간인이 이미 700명을 넘었으나 여기에 쏠리는 관심도는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시안 증오 범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비견되기도 하는 미얀마 사태는 상황이 그 보다 훨씬 나쁘다.

지역감정이 있다고 해도 단일민족인 한국과는 달리, 미얀마는 30여 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뤄져 있다. 특별한 외생 변수가 없었던 광주와는 달리, 미얀마를 둘러 싼 외부 세력들의 정치 경제적 셈법 또한 복잡하다.

지금까지의 움직임만 보면 유엔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 중국과 러시아는 미얀마의 뒷배가 되고 있다. 역내 국가들의 연합체인 동남 아시아 국가연합, ASEAN의 움직임은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회원국들은 내정 불간섭을 이유로 내세운다. 이 블럭에는 군부 독재가 ‘가짜 민주주의’로 포장된 나라가 미얀마 한 곳이 아니다. 이런 걸 따지다 보면 ASEAN 자체가 심각한 ‘실존적인 위기’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한 정치학자는 지적한다.

국경 일부를 맞대고 있는 태국이 대표적인 예다. 지난 2014년 민간정부를 뒤집어 엎고 들어선 태국의 군부는 쿠데타 5년 뒤 자기들 입맛에 맞는 헌법을 만들어 사실상 정국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미얀마 군부는 ‘태국 모델’을 추진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영국 식민지를 거쳐 2차 대전 후 일본의 지배를 벗어난 미얀마는 오랜 군부 집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62-2010년, 근 50년을 군사 독재정권이 지배했다. 간간히 치러진 선거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일부 군인들의 권력다툼으로 쿠데타는 이어졌다. 군부는 반정부 민주화 세력은 물론, 무슬림인 로힝야족 등 소수민족도 가차없이 처단하며 권력을 공고히 해 왔다.


속수무책 미얀마 사태를 지켜 보다 보면 한국전에서 한쪽 팔과 다리를 잃고, 의수와 의족을 한 채 군 복무를 마친 한 참전 미군의 말이 생각난다. 한국전에 바친 그의 희생과 노고에 감사한다는 말을 듣자 퇴역 대령은 이같이 말했다.

“자유를 얻은 사람들에게는 의무가 생긴다. 그 의무는 자유가 없거나, 자유를 잃은 사람들에게 다시 그 자유를 전하고 지키게 하는 것이다”. 한국전 참전은 먼저 자유를 얻은 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민이 특별히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시대에는 이런 의기와 정의감이 살아 있었다. 그 시절, 앞서간 분들의 당당한 정신에 머리가 숙여진다. 갈수록 개인이나 국가나 이런 정의감과 의기는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됐다. 미얀마 난민 가수 완이화의 노래가 더 애절해지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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