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LA 연극계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 있었다. 한인배우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발단이 되어 순식간에 아시안 인종차별 이슈로 확대됐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3월30일 미 주류연극계의 중요한 시상식인 제31회 오베이션 어워드(Ovation Award)가 화상으로 열렸다. 그런데 여기서 진행자가 여배우 부문에 후보 지명된 줄리 리(Jully Lee)의 이름을 잘못 발음한 데 이어, 화면에는 그녀가 아닌 다른 한인 여배우의 사진이 등장했다.
그것도 모자라 줄리 리의 출연작 ‘해나와 공포의 가제보’는 아시안 전문극단 ‘이스트웨스트 플레이어스’(EWP)와 주류극장 ‘파운튼 디어터’가 공동제작 했음에도 불구하고 EWP의 이름이 아예 빠진 점도 문제였다. 한두 개도 아니고 한꺼번에 세 가지 대형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당사자인 줄리 리는 처음에 너무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오더라고 했다. 그리고 이건 자기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름 없고 얼굴 없는’ 아시아인 모두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녀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지나가려했다.
그런데 소셜미디어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애틀랜타 총격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고, 아시안 인종혐오를 멈추라는 운동이 미전역에서 일고 있는 때이니만큼 이 해프닝은 일파만파의 반응과 분노를 불러왔다. “아시안 이름은 중요하지 않고, 아시아인들은 모두 비슷하게 생겼다는 고정관념, 이게 바로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현실”이라는 아우성이었다.
다음날 오베이션 시상식을 주관하는 LA연극연맹(LASA)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수였고, 모든 책임을 통감한다”는 사과문을 냈다. 그러나 소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EWP는 즉각 LASA 탈퇴를 선언했고, 소속 극단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취할 것을 촉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일주일도 안 돼 50여개 극단이 잇달아 탈퇴했는데 LA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극단들이 솔선수범한 것이다. LA뮤직센터의 센터디어터그룹(CTG)을 선두로 게펜 플레이하우스, 패사디나 플레이하우스, 보스턴 코트 등이 인스타그램 해시태그(#LeavingLASA)에 동참했다.
결국 지난 5일, 46년 역사의 LASA는 운영을 중단하고 영구폐쇄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오래전부터 백인 일색의 운영위원들이 백인극단 위주로 운영하고 있다는 불만이 제기되어온 단체가 한명의 아시안 배우의 이름과 사진과 소속극단을 무시한 대가로 삼진 아웃된 것이다. 정말 대단하고 통쾌한 일 아닌가?
문제의 연극 ‘해나와 공포의 가제보’(Hannah and Dread Gazebo)를 2019년 직접 보고 이 칼럼에 소개한 적이 있다. 평소 영어권의 연극을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한인 2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작품이고, 주류 연극계에서 극찬을 하길래 일부러 찾아가서 보았다.
박지혜 극본, 제니퍼 장 연출의 이 작품은 재미한인 가족이 할머니의 부음을 듣고 한국으로 달려가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다. 휴전선 부근의 노인병원에 살고 있던 할머니가 옥상에서 투신자살했는데, 몸을 날린 쪽이 DMZ의 북한 쪽이어서 시신을 찾아오는 일이 간단치가 않다. 이에 각자 입장이 다른 가족 4명이 갈수록 미궁에 빠져들며 좌충우돌하는 스토리가 스피디하고 코믹하게 전개된다.
한국의 건국설화와 역사, 남북 대치상황, 세대차, 한국과 미국의 언어와 문화차이, 거기에 미스터리와 매직까지…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이야기하느라 숨이 찬 느낌은 있지만 스토리가 독창적이고 이를 리듬감 있게 풀어나간 연출과 연기가 나무랄 데 없었던, 무척 재미있고 인상적인 수작이었다. 줄리 리는 여기서 다중역할을 맡아 기막히게 다채로운 연기를 펼쳐 보여 갈채를 받았고, 그 때문에 오베이션 어워드에 후보 지명됐던 것이다.
시상식에서 진행자는 그의 이름을 ‘절리 리’라고 발음했다. 일반적인 줄리의 스펠링(Julie)과 달라서 그랬을 수 있다. 그러나 주요 시상식에 후보 지명된 배우의 이름이 조금이라도 낯설게 느껴지면 사전에 알아놨어야 하는 건 상식적인 일이다.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이다. 한 인간의 존재를 규정한다. 내게 이름이 없다고 생각해보자. 나를 누구라고,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는가. 신문사에 들어온 신참기자에게 데스크가 누누이 강조하는 것 중 하나도 취재원의 이름을 절대 틀리게 쓰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기사여도 이름을 잘못 쓰면 그 사람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부르고, 사용하는 것은 대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오히려 서구문화에서 더 중요시되는 덕목이다. 미국인들이 처음 만났을 때 반드시 이름을 먼저 물어보고 인사하며, 이를 기억했다가 적절할 때 사용하는 것이 좋은 예다.
그런데도 영어 알파벳 표기가 어색한 타인종의 이름에 대해서는 그만큼 주의를 기울이거나 존중하지 않고, 때로는 일부러 웃음거리로 삼는 것은 인종에 대한 무시이고 모욕이다. 지난해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이 대선 캠페인에 나왔을 때 공화당 의원들이 고의로 그녀의 퍼스트네임을 잘못 발음하며 조롱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아시안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것도 인종차별 항목에 넣어야할까? 이참에 ‘아시안 이름 제대로 발음하기’ 운동도 벌여야할 것 같다.
<
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