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어느새 무르익어 가는데 아무런 판타지가 일어나지 않는다. 지루한 코로나 분위기에 흥취가 자지러진 탓일까. 나만 그런가. 못 견디게 외로우면서도 더욱 더 외로워지고 싶은 것은 무슨 탓일까. 끝이지 않은 코로나 계절에 대한 반항일까. 이런 자학이 바로 자살충동이 아닌지 궁금한 상황이다.
새봄이 오면 만물이 동력을 흡인하고 설레는 것이 상례인데 왠일인가. 도무지 판타지가 그려지지 않는다.
17세기 경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작중인물 ‘돈키호테(Don Quijote)’를 통하여 심오한 메시지를 인류에게 설파했다. 그 이후 인류는 그의 풍자와 부조리에 대한 칼날같은 꾸짖음을 뒤늦게 깨닫고 열광하였다.
기이하게도 살벌한 코로나 팬데믹의 일상이 친근감을 안기고 있음은 왠일인가. 도대체 코로나가 우리 인류에게 암시하고 있는 메시지, 그 내용이 무엇인가. 우리가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는 것은 코로나19의 위력과 화합하는 교감의 길을 찾지 못해서가 아닌가.
오늘 인류가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는 물질문명, 살상무기, 독재권력 그리고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품격을 벗어난 타락, 위선, 탐욕 이런 것들을 코로나가 응징하고 있는 그 메시지를 우리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전율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우리 인간들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코로나 시련을 겪으면서 ‘무생물’형태의 또 다른 지구의 주인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어렴풋이 상상이 가기도 한다.
인류가 코로나에 대항하여 백신을 만들어내자마자 이 무생물들이 스스로를 진화시켜 변이 바이러스로 우리를 공격해 오고 그리고 또 다시 진화시켜 또 다른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문득 우리 인간들의 호언장담, 거대한 탐욕들이 얼마나 왜소한 그리고 치기어린 유희인가 하는 것이 느껴진다.
아무튼 올 봄은 매우 특이한 봄이다. 평화와 생동감에 젖어드는 그러한 봄이 아니다. 예로부터 이상기후나 어질지 못한 다스림 앞에 백성들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어도 봄 같지가 않다)이란 탄식을 유행가처럼 읊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는 로마 신정황제의 친국 앞에 굽히지 않고 지동설을 주장하며 천체 순환의 논리를 굽히지 않았다. 지구는 둥글다고 했고 고문당하면서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며 소신을 지켰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 이들의 주장은 어불성설이었지만 결국 그들의 주장이 옳았고 종교, 과학문명의 개벽을 가져왔다.
지금 코로나 시련 앞에 ‘지구의 주인이 무생물과 인간’ 양자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시대의 논리처럼 전혀 엉뚱한 망상설도 회자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양자’ 대결이라면 내게 있어서 올 봄은 허황(?)된 상상 때문에 더 한층 외로움에 탐닉되어 있는 것인지 갈피를 찾기가 어렵다.
봄은 반드시 내년에도 우리를 찾아오겠지. 우리에게 생동감을 안기고 겸손, 평화와 악수하며 다시는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시련의 길로 접어들지 말라고 충고하는 봄이 와야겠지.
황당하게도 16세기 중종 때의 기생 신분이었던 황진이가 애인이 돌아오는 봄날을 상상하며 읊은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동짓날 기나긴 밤 한허리를 버혀내어 ‘춘풍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어른님 오시는 날이어들랑 굽이굽이 펴리라…”
고국의 봄이 그립다. 우리의 땅, 흙과 물과 바람이 머금고 자란 ‘신토불이’의 달래, 냉이, 물쑥, 씀바귀 밥상이 그립다. 여기 미국에도 왠만한 것은 다 있지만 미국산, 중국산, 게다가 설탕까지 뒤엉킨 반찬을 만나면 정나미가 떨어져 더욱 더 고국의 봄이 아쉬워 양미간이 뜨끔해진다.
우리 가곡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꽃만 말고 내 마음도 함께 따 가주…”
봄날의 외로움을 노래로 달래본다.
인간의 깊은 신앙도 첨단 의술도 끝 모르는 코로나 질책에 맥을 못추고 있다. 올봄이야 말로 우리 인류의 애달픈 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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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 전 한민신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