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는 퇴임 후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재임 시에는 비판과 혹평을 받았지만 세대가 지나면서 훌륭했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현직으로서는 높은 인기를 누렸지만 역사의 맥락 속에서는 아주 냉정한 평가를 받는 대통령도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평판이 좋아지고 있는 대표적 인물로는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을 꼽을 수 있다. 트루먼은 20세기 이후 유일한 고졸 대통령이다. 정치인이 되기 전까지의 삶은 소시민처럼 단순했으며 정치인이 된 후의 궤적도 지극히 평범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과정을 보면 “얼떨결에”라고 밖에 할 수 없을 정도다. 거의 무색무취한 그는 민주당 내 여러 세력들 간 알력 속에 1944년 타협의 산물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된다. 4선에 오른 루스벨트가 취임 한 달 만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는 정말 얼떨결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1948년 극적으로 연임에 성공한 트루먼은 전후 세계질서를 확립하면서 민주주의와 미국의 국익을 지켜내는 데 강단과 결단을 보였다. 하지만 카리스마가 강한 전임 루스벨트와 후임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사이에 끼어 평범한 대통령이란 이미지가 강했다. 실제로 퇴임 당시 그의 지지율은 22%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트루먼에 대한 역사 속 평가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매년 ‘대통령의 날’을 맞아 실시되는 정치학자들의 대통령 평가에서 트루먼은 당당히 6번째 정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유약한 듯 보이지만 강단 있고, 리더의 책임감을 무엇보다 중시한 그의 소신과 철학이 빛을 내면서 평가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별로 특출할 것 없어 보이는 인물이 예측을 깨고 의외의 업적을 이뤄내는 것을 빗대 ‘해리 트루먼 효과’(Harry Truman Effect)라 부르는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델라웨어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대통령에까지 오른 조 바이든의 역정을 보면 트루먼과 유사한 점이 적지 않다. 바이든은 레이건 이후 아이비리그 대학이나 대학원 졸업장을 갖지 못한 첫 대통령이다. 변호사이긴 하지만 소위 최고 스펙의 학벌과는 거리가 멀다.
대통령이 된 과정도 필연보다는 우연이 많이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바이든의 정치색은 중도이다. 말이 좋아 중도지 별 다른 특색 없다는 평가에 다름 아니다. 지난 2019년 4월 그가 또 다시 대권 도전을 선언했을 때 76세 고령이었던 그가 민주당 후보가 될 확률은 아주 낮아 보였다.
하지만 현직 트럼프를 꺾기 위해서는 자기 색깔이 강한 후보보다는 중도성향 후보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민주당 내에서 확산되고, 조기 사퇴한 일부 중도 후보들의 지지기반을 바이든이 흡수하면서 갑자기 판세가 뒤집어졌다. 여기에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팬데믹이 엄습하면서 그의 공감능력은 정치적 자산이 됐다. 만약 팬데믹이 닥치지 않았다면 바이든 대통령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최근 바이든의 대선 여정을 담은 책을 출간한 언론인 두 명이 왜 제목을 ‘럭키: 조 바이든은 어떻게 가까스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나’(Lucky: how Joe Biden barely won the presidency)로 했는지 이해가 간다. 바이든은 여러 우연과 행운이 겹친 덕으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팬데믹을 거치며 연방정부 역할과 관련한 패러다임에 극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역사적 순간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도 바이든으로서는 시운이라 할 수 있다. 평상시 정치 환경이라면 꿈도 꾸기 힘든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그는 지금 바람을 등에 업고 있는 형국이다.
결코 자신이 잘나서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게 아니라는 사실만 기억해도 권력은 겸손해질 수 있다. 자신이 받들고 봉사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잊지 않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이든은 평소 “노동자들은 그에 합당한 존엄과 존중을 누려야 한다”는 소신을 누누이 피력해왔다
이런 소신을 그가 가장 존경한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그랬던 것처럼 과감한 개혁을 통해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루스벨트의 진정한 후예’ ‘노동자들의 친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신은 혼돈의 시기에 종종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인간을 들어 올려 비범하게 사용해 왔음을 우리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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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