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 번역을 한다. 번역은 우리말을 갈고 닦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가족에 관한 글 하나를 보았기에 번역을 해보았다.
No family is perfect. / We argue, we fight. / We even stop talking to each other at times, but in the end, family is family… / The love will always be there.
완벽한 가족은 없다. / 다투고, 싸운다. / 때로 대화의 단절이 있기도 하지만 결국 가족은 가족이다… / 가족 안에는 언제나 사랑이 머물지니.
완벽한 가족은 없다는 것과 가족들도 다투고, 싸우고 대화의 단절이 있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가족은 가족이기에 거기에 항상 사랑이 있다는 부분에서는 멈칫거리게 된다. 남이라면 그 정도는 아닐 수 있는데 가족이기 때문에 더한 상처를 입거나 더 심한 충격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가족은 공유한 시간이 길다. 공유한 시간이 길다는 것은 서로에 대해 많이 안다는 뜻이다. 서로에 대해 많이 알기 때문에 남이라면 알 수 없는 약점도 잘 안다. 그래서 가족 사이에서의 공격은 남이 하는 공격보다 더 치명적이 된다.
전에 다니던 회사의 고문 변호사는 이혼소송을 맡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이불 속 얘기까지 다 나와요. 그거 해보면요, 인간이 싫어져요." 이 역시 가족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공격의 치명성을 말하는 것이다.
형제,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같은 사람, 아버지, 어머니 가신 후에도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사람, 형제는 가족이니까 거기에는 사랑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까? 사랑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사랑이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닐까?
형제는 공유한 시간이 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10대 중반이 되면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10대 후반이 되면 각자 노는 물이 달라진다. 취업을 하거나 사업을 하게 되면 말이 형제이지 얘기를 나눌 시간이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보다도 짧다. 각자가 자신의 주위 사람들과 각자의 세계를 형성해 나간다. 그러다 결혼을 하면 이제는 거처도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이기 때문에 친숙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나이 마흔이 넘어가면 형제가 공유했던 시간이 자신 삶의 절반도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기준으로 얘기를 해본다. 교회에서 가까이 지내는 사람 중에는 일 년에 52번이나 만나는 사람이 있다. 서로가 어느 정도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 못해도 1년에 30번 정도는 만난다. 그럼 형제는 어떤가? 결혼해서 독립한 형제는 그 정도까지 만나는 일은 없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과 결혼해서 독립해서 사는 형제, 누가 더 가까운 사람인가?
‘가깝다'는 것과 ‘사랑'이 전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는 것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로 시작하는 이은상의 가곡 ‘가고파’에 그런 대목이 있다.
처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 된 사이 /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형제도 그렇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르면서 형제들 가는 길이 나뉜다. 그러다 보면 ‘형제라는 이름'만으로는 메꿔지지 않는 간극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니 형제라는 가족관계에서 마냥 ‘사랑 타령'만 할 수는 없는 일이 생긴다. 특히 상속의 대상인 유산 앞에서 벌어지는 그 형제라는 이름의 민망함이라니….
번역 연습했던 그 문장에서 딱 한 줄만 남기고 싶다.
No family is perfect. / 완벽한 가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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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 / 스프링필드,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