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시안 여성, 굴절된 이미지

2021-03-23 (화) 정숙희 논설위원
작게 크게
“터질 것이 터졌다”고들 한다. 지난 1년 동안 아시안 인종증오범죄가 급증했고 최근 몇 달 동안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아시안 공격사건이 신문에 보도됐지만 주류사회와 사법당국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사람이 8명이나 죽고 나서야 난리법석을 치고 있다. 마치 그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건 자체는 비극적이고 유감스럽지만, 이로 인해 아시안 인종혐오가 이슈화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지난 주 내내 주류언론은 애틀랜타 마사지업소 연쇄총격사건의 배경과 원인을 조명하고 분석하며 쟁점화 했다. 아시안 언론인, 학자, 정치인 및 연예인들의 증언과 기고도 잇달았다. 대도시에서는 이를 규탄하고 종식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고, 이는 미국을 넘어 서구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아시아계 인권단체 AAPI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미전역에서 3,795명의 아태계인들이 차별과 증오범죄를 당했다. 하루 10건 이상이다. 실제 보고되지 않은 걸 감안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이중 70%의 피해자가 여성이었다. 이번 사건에서도 희생자 8명 중 7명이 여성이고, 그중 6명이 아시안, 4명이 한인여성이다.


처음에 현지 경찰은 총격범의 고백에 따라 “범죄 동기는 인종증오가 아니라 섹스중독”이라고 했다가 아시아계의 반발과 비난이 빗발치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 중”이라고 말을 바꿨다. 언제부터 경찰이 범죄자의 말을 이토록 신뢰했나. 인종혐오범죄로 분류되면 형이 가중되기 때문에 ‘백인’ 경찰이 ‘백인’ 총격범을 감싸준 건 아닐까.

“어제는 그에게 정말 나쁜 날이어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Yesterday was a really bad day for him and this is what he did)는 말도 어처구니없다. 우리 모두에게도 ‘정말 나쁜 날’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날 우리는 마사지업소를 돌며 여자들을 쏘아죽이지는 않는다.

주류언론은 이 사건을 성 중독보다는 인종차별(racism)과 성차별(sexism) 및 여성혐오(misogyny)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범죄로 보고 있다. 게다가 총격범은 보수 남침례교단의 독실한 신자이며 광신적인 면도 보였다고 하니, 역설적이지만 종교와 정신문제도 함께 가졌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좀 더 미묘한 이슈가 있다. 미국 남성들의 아시안 여성에 대한 불순한 이미지가 그것이다. 오래전 이민 왔을 때 백인남성들로부터 자주 듣던 말이 있다.

“한국여자 좋아해요.”(I like Korean girls.)

이건 칭찬이 아니다. 거의 성희롱에 해당하는 말이다. 왜 ‘한국여자’라는 집단이 좋을까? 한국여자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다. 아시안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미국남성들의 비뚤어진 인식, 페티시즘이 그것이다.

서구세계가 동양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다. 푸치니의 ‘나비부인’과 ‘투란도트’가 대표적인 ‘오리엔탈리즘’ 오페라이고, 반 고흐도 일본 판화에서 영향 받은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때부터 아시안 여성은 순종적이고 수동적이라는 스테레오타입과 함께 이국적인 성적 판타지가 생겨났다.


이런 이미지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불건전하게 고착됐다. 필리핀, 한국, 베트남, 태국 등에 주둔한 미군부대 주변에는 성매매업소들이 형성되었고, 먹고살기 위해 내쫓기듯 윤락녀로 나서는 여성들이 있었다. 그 경험 때문에 아시안 여성을 성매매로 연결 짓는 미국남자들이 많아진 것이다.

운 좋게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건너온 여성들도 있었지만, 이혼하고 나서 마사지 팔러를 차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때문에 아시안 운영의 마사지업소는 성매매의 온상으로 오래전부터 미 사법당국의 단속 대상이었다. 이번 사건이 일어난 마사지 숍들은 단속대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섹스중독인 범행자가 이 업소들의 고객이었다는 사실은 그 이면을 짐작하게 한다.

백인우월주의는 대개 남성우월주의와 동의어이고, 여성차별과 혐오로 이어진다. 아시안 여성 페티시즘에 흔히 폭력이 동반되는 이유다. 하지만 남존여비문화에 길들여진 아시안 여성들은 참는 데 이력이 나있어서, 또는 영어 불편이나 체류신분 때문에 이를 신고하거나 문제 삼지 않는다. 소리를 내지 않으니 폭력은 용인된다.

팬데믹 기간에 드러난 미국의 가장 큰 위기는 경제도 양극화도 아닌 인종차별이다. ‘흑인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한동안 휩쓸고 지나간 거리에서 이제는 아시안 증오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울리고 있다. 부디 조지아의 비극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위험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아시안 여성에 대한 일그러진 고정관념을 걷어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정숙희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