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한국에서 트로트 열풍이 한창이라는 소식이다. 일종의 복고주의라고나 할까, TV마다 ‘미스 트로트’다 뭐다 마치 경쟁하듯 트로트 프로그램들을 방영하며 화제를 뿌리고 있다. 나 역시도 개인적으로 KBS TV가 주관한 ‘트로트 전국체전’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며 한동안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낀 소감은 선진국 진입에 대한 일종의 자신감이라고나 할까, 한국적인 풍류와 리듬을 무한 발산하면서 스스로를 자축하고, COVID-19 등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폭발하는 사회 현상처럼 비쳐졌다. 클래식을 와인에 비교한다면 트로트나 대중음악은 소주나 사이다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푸는데 있어서 트로트만큼 쌈빡한 해방감을 맛보게 하는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트로트 열풍을 꼭 부정적인 면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국민은 원래 풍류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우리의 민요, 판소리 등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예로부터 한국민처럼 풍류와 가무를 좋아하는 민족도 없었다. 한국민만큼 열심히 일하고 또 삶의 피로를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풀줄 아는 민족도 없다.
요즘의 한국 트로트 열풍은 과거 일본 쇼와시대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그 무엇이 있다. 70년대에 이미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일본은 미소라 히바리 등을 앞세워 엔카 열풍이 한창이었다. 우리나라가 통기타 소리의 우울하고 끈적한 노래들을 들으며 움츠러들고 있을 때 일본은 엔카 등 원색적인 리듬을 무한 발산하며 승리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특히 그 중심에 재일교포 2세로 알려진 미소라 히바리가 있었다. 한국으로 말하면 이미자와 조용필을 합친 것과 같은 존재였는데 그녀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재일교포 야구선수 장훈이 한때 히바리의 공연을 보고싶어 야쿠자가 되고 싶어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을 정도다. 당시 일본은 연예계와 공연계를 야쿠자들이 쥐고 흔들고 있었는데, 전성기 때의 히바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당시 장훈의 심정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70, 80년대 일본의 위상은 가히 제2의 태평양 공습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나 역시도 아버지께서 당시 사업차 일본을 방문 중에 있었기에 일본의 경제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간접 체험해 볼 수 있었다. 또 80년대에 미국에 이민왔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일본에 대한 인지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도 실감하고 있었다. 지금도 샌프란시스코에 재팬타운이 있지만 당시 재팬타운내 쇼핑몰에 진열되어 있던 소니, 파라소닉, 히다치 등 일본 가전제품들의 하늘 높았던 인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할 정도다. TV, 스테레오는 물론 자동차까지 일제하면 디자인 쌈빡하겠다 품질 우수하겠다 모두가 뿅 가던 시절이었다. 경제대국으로서, 최강국 미국을 넘볼 수 있는 나라는 일본이 유일했다. 그 일본의 전성기를 취하게 했던 가수가 바로 미소라 히바리였다. 미소라 히바리를 모르면 사실 한국과 일본의 가요를 이야기하기 힘들다. 물론 한국 사람들은 한국의 트로트를 한국만의 리듬을 살린 고유 장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엔카를 들어보면 한국의 트로트가 가사만 다를 뿐, 일본의 엔카를 그대로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엔카와 트로트는 너무도 닮았기 때문에 트로트가 엔카를 모방했는지 혹은 엔카가 트로트를 모방했는지는 다소 헷갈리는 문제이지만 트로트나 엔카 모두 그 뿌리는 우리 민족의 판소리, 민요 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일본의 가부끼에는 엔카나 트로트의 모티브를 연상할 만한 선율적인 요소란 찾아볼 수가 없다.
일본의 엔카 가수 중에는 미야코 하루미처럼 공개적으로 재일교포임을 천명한 가수들도 있었지만 히바리처럼 신분을 감춘 재일교포들도 많았다. 특히 히바리의 경우는 아직도 일본인들이 그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경우인데, 그것은 그만큼 히바리의 존재가 일본인들의 자존심에도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쇼와의 가희(歌姬)로 불리는 히바리는 일본인들에게는 쇼와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1989년 타계하기까지 대단한 인기를 구가하였으며, 지금도 일본에서는 엔카 가수하면 미소라 히바리를 먼저 떠올릴 만큼 누적 음반 레코드 판매량만도 8,000만장이 넘는, 비공식 일본가수 음반 판매량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히바리는 다소 중성적이며 허스키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는데, 52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그녀의 생애가 말해주듯 화려하고 짧게 살다갔다. 대중 가요란 단순히 노래만 잘 불러서는 흥행이 되지 않는다.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소위 말하는 휘발성 매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래 실력으로 승부한다면 클래식 가수들이 더 위대할지 모르지만, 대중가수란 남이 없는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히바리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그런 매력이 있었다. 카랑카랑하면서도 어딘가 비극적인 목소리는 호소력이 있었고 그녀의 짧은 일대기도 일본인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한국의 트로트 열풍은 나름 시대적인 현상이기도 하고 또 스트레스가 쌓여가는 시기인 만큼 어느 정도 긍정적인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가요는 대중가요일 뿐이다. 히바리의 경우가 그렇듯 쌈빡하고 일시적인 흥분은 일시적인 것으로 그쳐야 한다. 일본의 경제가 그녀의 사망 후 ‘쇼와(昭和 천황1926-1989)시대’를 마감하고 거품경제로 무너졌듯 샴페인을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터트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한국의 트로트 열풍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쳐야 한다. 더욱이 송가인, 김호중 등은 원래 국악과 클래식을 했던 사람들이다. 대중적인 스포트라이트도 중요하지만 너도나도 하루살이 인기에만 연연한다면 장기적인 안목의, 한국의 음악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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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