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누가 법치를 훼손했나

2021-03-10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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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내내 문재인 정부와 끊임없는 갈등을 빚어 온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주 사퇴했다. 그의 사직은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이었다. 그동안 “사퇴는 없다”며 배수진을 쳐왔지만 최근 행보를 보면 자신의 입지와 명분을 최대화하면서 사표를 던질 수 있는 시점을 저울질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는 검찰개혁의 일환으로 중대범죄수사처 신설 논의가 시작되자 최적의 명분과 타이밍이라 판단하고 이것을 빌미삼아 사실상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는 결정을 내린 것 같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밝힌 사퇴의 변에서 아주 강경한 톤으로 “이 나라를 지탱해 온 법치 시스템과 헌법정신이 파괴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상식과 정의가 무너지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보기 어렵다”고 울분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법치주의와 헌법정신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될 국가의 근본가치이다. 이것이 흔들리면 국가와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고 민주주의는 위협받게 된다. 하지만 과연 윤 전 총장 자신은 법치주의 훼손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법치주의라는 말처럼 한국사회에서 오용되고 남용되어온 단어도 찾아보기 힘들다. 권력은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사용되고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 이 말의 참뜻이다. 따라서 법치주의의 가장 우선적인 적용대상은 일반국민들이 아니라 권력기관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법치라는 말은 권위주의 정권들 아래서 국민들을 복종시키고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악용돼 왔다. 정작 법치의 일차적 대상이 돼야 할 권력기관들은 법치주의를 무너뜨리는 일에 앞장서 왔다. 그런 권력기관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검찰이었다.

이런 검찰의 일그러진 행태가 반복되지 못하도록 바로 잡자는 것이 검찰개혁의 취지다. 인사권자가 연공서열상 결코 검찰총장이 될 수 없었던 그를 파격적으로 그 자리에 앉힌 데는 이런 책무를 충실히 수행해 달라는 당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뼛속까지 ‘검찰주의자’인 그는 검찰총장 자리에 앉아 있던 20개월 동안 검찰 기득권 지키기에만 몰두한 모습이었다.

그 과정에서 어김없이 동원된 전형적인 방식은 ‘선택적 수사와 기소’였다. 무엇을 할 수 있는 힘 못지않게 무엇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역시 막강한 검찰 권력의 핵심을 이뤄왔다. 같은 혐의와 죄질인데도 마음먹기에 따라 누구는 혼내고, 누구는 없던 일처럼 봐줄 수 있다는 얘기다. 검찰개혁의 필요와 당위성은 바로 법치의 정신과 너무 거리가 먼 이런 선택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을 바로 잡아 달라고 칼을 쥐어줬더니 윤 전 총장은 검찰조직의 이익과 기득권을 지키는 데 이것을 사용했다. 대표적인 검찰개혁론자인 조국 가족의 혐의에는 마치 반국가 범죄를 수사하듯 대대적 인력을 동원해 달려들면서도 정작 검찰 내 자신의 측근들과 가족의 혐의에는 고개를 돌렸다.

닭 잡는 칼이면 충분한 사안에는 소 잡는 칼을 쓰고, 정작 소 잡는 칼을 사용해야 할 혐의에는 커터 칼조차 빼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정의와 상식, 공정과 중립이라는 말을 계속 입에 올려왔다.

그는 총장 취임 수개월 후 국회에 나간 자리에서 “어느 정부가 그나마 중립적이었냐”는 한 의원 질문에 “이명박 정부 때 상당히 쿨하게 처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답했다. 이명박 정권 때 법치주의는 권력기관들에 의해 가장 극심하게 훼손됐다. 법치 정도는 가볍게 무시해도 그만이었던 검찰의 호시절을 윤 전 총장은 중립적인 시절로 왜곡해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법치와 헌법정신이 파괴됐다”고 남 탓만 하며 자리를 떠났다. 자신의 총장 재직 중 행태 역시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살아 있는 권력이든 죽은 권력이든 수사하고 처벌할 일 있으면 혐의의 경중에 맞춰 합당하게 처분하면 된다. 하지만 수사와 기소권이라는 무시무시한 권력의 쌍칼을 쥔 사람이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 들이댈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 그런 엄격함을 윤석열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모든 게 너무 선택적인 검찰총장이었다.

대통령은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한 데 따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이제는 국민들이 선택을 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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