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말 초대형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과 뉴저지 등 북동부 지역을 할퀴고 지나가자 연방의회는 다음해 초 샌디로 발생한 엄청난 피해 복구를 위한 505억 달러 규모의 구호법안 논의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 구호법안은 예기치 못한 암초에 봉착한다. 텍사스 출신 연방의원들이 이 법안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텍사스 주 연방 상원의원 2명과 연방 하원의원 22명 등 총 24명 가운데 존 컬버슨 하원의원을 제외한 23명이 구호법안 동과에 제동을 걸었다.
텍사스 출신 의원들의 집단적인 ‘딴지걸기’의 중심에 있던 인물은 초선의 연방 상원의원 테드 크루즈였다. 그는 “구호예산의 3분의 2는 쓸데없는 지출”이라며 법안 반대에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그는 티파티의 지원을 등에 업고 상원에 진출한 극우 정치인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렇게 댔지만 그가 오바마 당시 대통령과 민주당에 심술을 부린 것이란 걸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하지만 2017년 그의 처지는 수세로 뒤바뀐다. 2017년 텍사스를 강타한 초대형 허리케인 하비 피해구호 법안이 연방의회에 상정된 것이다. 크루즈를 비롯한 텍사스 출신 의원들은 동료 의원들에게 구호를 호소하고 나섰다. 연방의회는 고통 받는 이재민들을 생각해 이를 신속히 처리했다.
하지만 5년 전 허리케인 샌디 당시 이재민 구호법안을 가지고 심술을 부렸던 크루즈에게는 비판과 조롱이 쏟아졌다. 뉴저지의 크리스 크리스티 주지사는 그를 ‘위선자’라고 불렀다. 이를 계기로 크루즈에게는 ‘위선의 정치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게 됐다.
위선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와 언행으로 밉상 이미지를 갖고 있는 대표적 정치인으로 꼽혀온 크루즈는 지난주 ‘내로남불의 끝판왕’이라는 타이틀을 굳히는 자충수를 뒀다. 사상 최악의 혹한과 정전, 단수사태로 텍사스 주민들이 혹독한 고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가족들과 태양이 내리쬐는 멕시코 칸쿤으로 도피성 여행을 떠난 게 들통 난 것이다.
미국인들이 크루즈에게 더욱 분노하는 이유는 그가 위기 발생 시기에 휴가를 떠나는 정치인들을 가장 앞장서 격렬히 비난해 온 인물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불과 두 달 전 텍사스 어스틴의 스티브 애들러 시장이 친구들과 멕시코로 휴가를 간 상태에서 시민들에게 ‘집에 머무르라’는 동영상 메시지를 띄운 사실이 드러나자 “완전한 위선자다. 그의 행동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격하게 비난하는 트윗을 날렸다. 크리스티 주지사의 가족 여행에 시비를 걸기도 하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기금모금 행사를 너무 많이 다닌다”고 비난하면서 ‘부재자 대통령’이라 조롱하기까지 했다.
자신과 남을 서로 다른 이중 잣대로 재단하는 이른바’‘내로남불’의 행태는 어김없이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 다른 정치인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해 온 크루즈는 자신이 쳐놓은 그 비난의 덫에 스스로 걸려들었다.
쿠바 이민자의 아들인 크루즈는 하버드 법대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아주 잘한 수재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가 최고의 학벌을 갖고 있음에도 종종 합리성과는 너무 동떨어진 신념체계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기후변화 등 여러 이슈들에 음모론적 시각을 드러내 왔다. 바이든 대통령이 파리기후협약에 복귀하자 그는 “피츠버그 시민들의 일자리보다 파리 시민들의 시선에 더 신경을 쓰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파리기후협약은 파리 시민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도무지 명문대를 졸업한 정치인의 인식수준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최고 명문법대를 나와 법률적 지식은 어느 누구보다 많이 갖고 있을지 몰라도 그 지식 위에서 인간으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 계속 성장하는 데는 실패한 공부기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권력과 위선의 상관관계를 연구해온 정치심리학자 요리스 라메르스는 “위선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진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는 눈을 부라리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다”고 지적한다. 크루즈에 딱 들어맞는 진단이다.
이상 한파 같은 기후현상은 텍사스 주민들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입으로는 ‘애국’과 ‘애민’을 외치면서도 막상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도망가는 위선의 정치인,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을 솎아내는 일만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다. 크루즈가 “6년 더”를 외치며 또 다시 나서게 될 2024년 선거는 텍사스 유권자들의 기억력과 판단력을 시험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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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