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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와 조수(1)

2021-02-11 (목) 심재훈 / 클락스버그,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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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5,060. 통계에 의한 로또 당첨 확률입니다. 다시 말해서 8,145,060장의 복권을 한 회에 각각 다른 번호로 사면 당첨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현실적으로 제로에 가까운 확률에도 불구하고 매주 행운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이십 년 가까이 매주 빠지지 않고 복권을 사왔지만 당첨의 행운을 받기 보다는 아내에게 불가능한 헛꿈을 꾸고 있다는 질책을 보상으로 받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인구를 4,500만 명으로 볼 때, 미국에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사람의 숫자 300만 명 중 워싱턴 인근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의 수가 대략 20만 명 정도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 지구 반대편, 같은 하늘, 같은 땅 위에 함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 인구 75억 가운데 4,500만으로, 다시 300만으로 나누고 다시 20만분의 일로 나누는 것 까지만 해도 조금 복잡한 계산이 됩니다. 그런 소중한 인연 중에 함께 만나고 아끼고 걱정하는 관계의 확률을 다시 보태면 로또의 당첨 확률보다 훨씬 복잡한 계산이 될 듯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관계는 모두 소중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한 것이 1970년대 초, 그 당시 대한민국 군인의 수가 60만 명을 넘는다고 그랬습니다. 그 중에서 같은 부대, 같은 내무반, 같은 행정반의 사수, 조수로 만날 수 있는 인연의 확률은 60만분의 일입니다.
군대란 곳이 특별한 곳이어서 군대의 삼년은 사회의 시간과 비교할 수 없는 기간으로 때로는 힘들고 길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만큼 소중한 시간입니다. 한창 성장의 정점에서 앞으로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 될 수도 있고,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사회적 규율과 원칙을 습득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친구가 되고 선후배가 되고, 형 아우가 되어 나름의 기준과 질서를 만들면서 지내게 됩니다.
그런 여러 가지 관계 중에서 오직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사수와 조수라는 매우 특별한 관계는 소위 '까라면 까' 라는 식의 이유를 댈 수 없는 복종과 함께, '안되면 되게 하라'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불굴의 정신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런 전통과 정신의 계승은 사수가 제대하면 조수가 사수가 되고, 또 따른 조수가 만들어지고, 다시 전통과 정신을 이어 받으며 건강한 조직을 지탱하는 동력이 됩니다.
나는 그 사수의 조수였습니다. 어리버리한 이등병 시절 훈련병 신분에서 벗어나 자대 배치를 받은 신병 중에서 사수는 나를 조수로 지명하였고 그 날부터 사수의 숨소리마저 흉내내야 되는 조수가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인간으로서의 인권보다 군인으로서 군권이 우선이던 시절, 사수의 식사 조달에서 부터 잠자리의 정리 정돈까지 조수의 몫이었고 사수를 통해 군 생활의 규율과 규범을 비롯해서 행정적 기능까지 배우고 익히게 됩니다.
로또의 확률보다 어려운 인연에다, 다시 군 생활의 관계까지 더하여 군 제대 이후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제로의 확률이 미국의 수도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나는 그 인연을 즐기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두 사람의 관계가 사수와 조수 관계이기를 소원합니다. 사십년 만에 만난 시간 속에도 나에게 사수란, 이등병시절 느꼈던 커다란 산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부담스러운 사수로 보이기는 해도 나를 지키고 막아주는 커다란 방패로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춥고 배고프던 쫄병의 마음을 헤아리던 그 마음을, 이제는 제법 먹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느끼고 싶고 간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청년시절 군인은 아니지만 아직도 사수가 있는 조수라는 것이 다행이고 행복합니다.

<심재훈 / 클락스버그,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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