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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 이야기

2021-02-07 (일) 문일룡 변호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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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동북부에 사는 큰 아들이 사진을 한 장 전화로 보내왔다. 결혼 반지를 낀 사진이었다. 사실 결혼식은 작년 여름에 계획했었는데 팬데믹으로 인해 1년 연기했다. 그리고 큰 애는 그 연기한 결혼식마저 올해 초에 아예 취소하고 그냥 신고만 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몇 주 만에 결혼반지를 마련해 끼고 찍은 것이다. 아직 결혼신고는 안 했지만 어차피 필요한 반지이기에 준비했다고 한다. 아직 밖에 끼고 다닐 수는 없지만 집안에서는 괜찮겠다 싶어 꼈는데 기분이 묘하단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면서 몇 년 전 큰 애가 나에게 느닷없이 했던 질문 하나가 생각났다. 대학원에 제출하는 장학금 신청서류에 자신의 자산을 기입해야 하는데 자신이 여자친구에게 주려고 준비한 반지도 자산으로 간주하느냐는 물음이었다.

대학 졸업 후 먼저 몇 년 간 일을 했던 큰 애는 당시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 전 프로포즈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반지를 하나 준비했다. 여자친구와는 대학교 1학년 때 클럽활동을 같이 하면서 1년 정도 사귀다 헤어졌었다. 그러나 졸업 후 다시 만나 여러 해 사귀어 왔으니 서로 안 지가 10년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외국에서 살고 계시는 여자친구의 부모님들에게 우선 말씀을 드려 허락을 맡고 프로포즈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게 그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나라의 문화라고 익히 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프로포즈 계획은 여자친구 모르게 준비하는 것이었기에 부모님에게 연락하는 것도 여자친구 모르게 했어야 했다.


가까스로 지구 반대편에 사는 여자친구 부모님 댁에 전화해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그랬더니 그런 중요한 얘기를 전화로만으로는 할 수 없으니 직접 와서 마주 보고 앉아서 하라고 하셨단다. 그다지 어렵지 않게 프로포즈를 추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큰 애가 복병을 만난 셈이었다.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여자친구 몰래 부모님 댁에 다녀오나. 비행기로 가고 오는 데 각 하루 씩, 그리고 그 곳에 단 하루만 머물러도 총 사흘의 시간을 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대학원 진학을 위해 모아둔 학비와 생활비의 일부를 여행비용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그러던 중 여자친구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는 김에 혼자 오지 말고 여자친구와 함께 오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둘이 와서 같이 얘기 하라는 것이다. 맙소사, 이럴 수가. 같이 가게 되면 당연히 여자친구 모르게 준비하는 프로포즈 계획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었다. 말씀을 거역할 수도 그러나 그대로 따를 수도 없는 곤경에 빠졌다. 결국 큰 애는 프로포즈 계획을 연기했다. 적당한 시점에 자연스럽게 둘이 함께 하는 부모님 댁 방문부터 추진해야 했다. 그리고 프로포즈 때 사용하려던 반지는 여자친구가 발견하지 못하도록 깊은 곳에 감추어 놓았어야 했다.

다행히 여자친구에게 반지의 존재는 노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원 장학금 신청서류에 과연 그 존재 여부를 밝혀야 하는지가 큰 애가 나에게 물어 본 질문이었던 것이다. 당시 그 질문이 농담이었는지 진담이었는지는 아직도 판단이 잘 안 선다. 그러나 곧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기에 자산으로 간주하기도 그렇지만 얼마짜리 반지인지는 몰라도 가지고 있던 돈을 주고 산 귀중품이니 자산으로 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드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나는 대답을 확실하게 못하고 그냥 대충 웃어 넘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주에 결혼반지까지 구입했다는 큰 애 얘기를 들으면서 이제 다 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뿌듯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네 나이 때 너는 벌써 두 살이었는데’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래도 가족 계획이 있으면 한 해라도 더 젊었을 때 애를 갖는 것이 좋다는 만고의 진리를 전하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간절하다.

<문일룡 변호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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