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변화를 이끄는 사람들

2021-01-23 (토)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크게 작게
몇 주 전 2020년이 지나갈 무렵, 매년 그렇듯 트위터 및 여러 소셜미디어에 잇따라 새해에 대한 소망이 하나 둘 씩 올라왔다. 모두에게 악몽으로 남은 2020년에 대해 숨김없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밈(meme)부터, 2021년에는 많은 것들이 바뀌기를 바라는 너무나 희망적인-혹은 약간의 거부감이 들 정도로 희망적인-글 들 까지 사람들이 얼마나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지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원래 연말은 그런 시간들이니까’ 하며, 나도 고마움을 표시하고 꼭 만나서 인사하고 싶다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어느새 커다란 희망이 되어버린 말들을 담은 카드들을 써 보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희망을 잠시 품었다는 것이 순진했다고 느낄 정도록 쉽게 변하지 않는 것들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이 나온 이후로도 연일 기록을 갱신하는 미국의 코로나 상황,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부추긴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백악관 테러와 속보에서 보여진 태극기 등 지난 해 더이상 나빠질 수 없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던 이들의 말에 보란 듯이 연일 이어지는 뉴스는 이것이 현실이라고 호통치는 듯 했다. 한국에서도 기록적인 코로나 감염 소식에, 이낙연 대표가 슬며시 건의한 전직 대통령 사면, LG트윈타워 청소 노동자 해고 사건, 양부모의 입양 아동 학대 사건, 여성 남성 아이돌 그룹 팬덤 문화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까지, 그렇게 녹록치 않게 2021년을 맞았다.

오래 전에 본 끔찍하고,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영화를 다시 보기 하는 것 같은 시간들을 보내며, 우리가 삶을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낸 일련의 장치에 대해 약간의 반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막막하고 마냥 끝없이 어두울 것 같은 현실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에서는 얼마 전, 형법 67년후가 되어서야 낙태죄가 사라졌다. 여성의 임신 중지 처벌 끝의 뒤에는 열심히 글을 쓰고, 국민 청원을 시작하고, 집회를 열고, 시위를 해 온 시민단체들, 법안을 만들어 대화를 다시 시작하게 한 권인숙 의원과 이은주 의원이 있었다. (아직도 모자라지만) 이제야 조금이나마 나아질 택배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 또한 뒤늦게나마 구성된 사회적 합의기구의 역할이 크다. 두 가지 업적 모두, 셀 수도 없는 많은 이들의 희생과 죽음 이후에서야 이루어졌다.

아주 오랫동안 시니컬한 비관주의자로 살아온 내가 최근 들어 희망을 품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들이다. 내가 바꿀 수 없을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들을 바뀌게 한 사람들은 그동안 꾸준히 변하지 않는 것들에 맞서서 포기하지 않고 싸워왔다. 아마 우리가 상상 할 수도 없을 만큼의 아픔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잠에 들 수 없는 많은 밤을 보내며 또 다른 내일을 그려왔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저릿한, 또 서늘한 상처들을 안고 변화를 만들어 내는 이들이 주는 메시지는 크고 웅장하다. 그들이 바꾸어 낸 현실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치유를,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건네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가 누리는 변화는 우리가 빚을 진, 변화를 위해 싸우는 많은 이들의 노동과 상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얼마전, 한국 문화 잡지 릿터에서 낸 정세랑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그녀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돈다.

“세상은 잔혹할 정도로 폭력적인 곳이지만, 오늘 내가 울며 기댄 어깨는 친절하고, 어딘가엔 이런 사람이 더 있겠지. 좋은 사람들에 대해서 써야지 하고요. 폭력에서 고개 돌리는게 아니라, 폭력적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계속 이야기 하다 보면, 세상에 그런 면이 미미하게라도 반영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써요.” 정세랑 작가의 말로 하여 변하고 또 변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 살며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에 감사하고, 또 그런 변화를 읽어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또 한번 깨닫는다.

그렇게라도 조그마한 다름을 알아가고, 나의 깨달음으로 또 다른 좋음을 만들어 내는 오늘은 아마 그 전의 어제와는 아주 다른 날 일 것이다. 작은 변화를 알아차리고, 그 변화에 동참하고, 그 변화를 이끌어 낸 이들을 감사하며 사는 삶이 변화 없이 보이는 세상을 바꾸어 살아 나가는 일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