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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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로서의 나의 이민생활

2021-01-17 (일) 헤롤드 변 / VA 클립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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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9월 나는 휘문중학교를 졸업하고 세 명의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덜레스 공항에 내렸다. 미국에 도착한 후 받은 첫 인상은 한국과 달리 공기가 상쾌했다는 점이다. 5년 동안이나 떨어져 있던 부모님을 이곳에서 만나니 그 즐거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 차를 타고 알링턴 집으로 가면서 크고 작은 차들이 홍수처럼 줄 지어 오가는 것을 보고 비로소 꿈에 그리던 미국에 와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마련한 알링턴 집은 벽돌 일층 집이었다. 호화스러운 양옥집은 아니었으나 한국과 달리 정원이 넓고 시원스러웠다. 한편 무섭기도 했다. 한국에 비해 나무가 많고 집이 띄엄띄엄 있어 한국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지금 가 보니 그 집은 무섭지 않은 작은 집이었다.

하여간 감격적인 주말을 보내고 하루도 되지 않아 아버지를 따라 웨이크필드 고등학교에 등록했다. 그러나 일 년 간은 교실에 앉아 선생님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그냥 앉아 있었다. 일 년이 지나자 영어에 눈이 뜨이기 시작했고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그 당시 한인 학생은 4명뿐이었다. 대학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중 갑자기 1973년 우리 집에 육군 모집원(US Army recruiter)이 와서 미 육군에 가야 된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내가 ‘Selective Service', 즉 만 18세가 넘었는데 등록을 하지 않아서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월남전쟁이 끝나는 중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내가 군 입대를 하는 날 아침, 그레이하운드 버스 정류장에 환송 나온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어처구니 없었는지 눈물만 흘리고 계셨다.

군 복무를 마친 나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것은 G.I. Bill이었다. 그 혜택으로 VCU(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교) 화학 학사학위를 받고 UVA(버지니아대)에서 화공학 석사학위를 획득했다. 이어 미 상공부 특허국에서 34년을 근무하다 2020년 12월에 은퇴했다.
그동안 나는 믿음으로 거듭난 크리스천이 되었고 군 복무를 마쳤다는 긍지와 이 땅에서 교육을 받은 배경으로 정치활동에도 참여, 특히 한인사회를 위한 봉사와 함께 주류사회와의 다리 역할을 꾸준히 해왔다. 아버지(변만식)의 정다운 충고와 지도로 여기까지 온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헤롤드 변 / VA 클립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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