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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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죽

2021-01-05 (화) 조태자 /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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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음식이 보약이라고 시장에 가면 늙은호박들이 많이 보인다.
늙은호박의 변신은 참으로 경이로운데 아주 어릴적 애호박은 연두색이고 속이 무르고 연하지만 시간이 갈 수록 모양과 색깔과 맛이 전혀 다른 늙은호박이 되어 버린다.
이 세상 모든 생물은 늙으면 퇴화하고 약해지면서 살아온 자리에서 변두리로 물러나지만 늙은호박은 애호박때와는 아주 딴 모습으로 화려하게 변화되어 우리들에게 귀한 먹거리를 제공한다.

시장에 갈 때마다 보게되는 늙은호박은 나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어릴적 먹던 호박죽 생각이 나서 호박을 만지작 거리다가 오곤했다.
나의 고향에서는 호박범벅이라 부르며 기존의 호박죽보다 더 껄죽하고 으깬 호박과 팥과 새알옹심이가 들어간 달달한 맛이 나는… 주로 초겨울에 먹었던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호박범벅을 늘 백자 항아리에 담아 두시곤 했는데 늙은 호박을 볼 때 마다 호박범벅이 너무 먹고 싶어 거의 몸살이 날 지경 이었다.

드디어 호박죽을 만들어 보기로 마음을 굳히고 시작 하였지만 처음에는 물의 양을 조절하지 못해 모양새가 엉망이었지만 두 번째는 잘 만들어졌다. 황금빛의 찬란한 호박죽은 너무 맛있어서 나의 솜씨를 반신반의 하면서 주위의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 했다.
그러자 이 호박죽을 함께 음미해볼 나의 곁을 떠난 친구들이 그리워졌다.
나와 함께 오랫동안 등산을 한 친구 A는 아들이 살고 있는 텍사스로 떠나버렸다.


몇년 전 눈이 내린 후 1월의 어느날 등산을 갔는데 깊은 산속의 개울은 눈녹은 얼음물이 흐르고 있었고 바위들 위에는 얼음이 덮혀 있었지만 일행은 무사히 개울을 건넜다. 하지만 친구 A는 미끄러지면서 그만 뒤로 넘어 져 일어나지를 못해 땅위로 올라온 네 명의 여자들이 다시 찬 물속으로 들어가 친구를 일으켜 세워 뭍으로 올라 왔다.
친구 A는 팥죽을 만들어 보온통에 넣어 짊어지고 있었으니 그 무게로 인하여 일어 날 수가 없었다. 친구 A의 못말리는 친구사랑, 음식사랑이었다.

우리는 그만 우리 꼴들이 너무 우스워 발을 동동 구르며 박장대소 하였다.
딸이 살고 있는 시애틀로 이사 가버린 친구 B는 나와 함께 음악회, 전시회, 박물관 등을 다니며 많은 사연과 추억을 공유한 친구이다.
재작년 11월초 김장을 할량으로 농장에 갔는데 친구는 무우를 뽑다가 그만 무우를 안고 뒤로 벌렁 나자빠져서 우리는 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농장을 떠날 무렵 농장 주인집 빨래줄에 줄줄이 널려 있는 무청시래기를 너무 갖고 싶어 넋이 빠져 보고 있었는데 농장 주인이 한웅큼 주어서 너무 고마워 감지덕지 하면서 허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면서 그곳을 떠났다.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친구들이 떠나 간다는 것을….
소중한 인연과 아름다운 추억과 찡한 그리움을 남긴채 내 인생의 한 공간을 함께 해주고 떠난 고마운 친구들이다.
우리 고유의 토속음식인 호박죽은 건강식이고 힐링음식이다. 죽 이라면 으레히 노인이나 환자만 먹는 것으로 안 것은 오해 였다.
호박죽이 이렇게 맛있다면 하고 팥죽과 녹두죽도 만들어 보았는데 역시 너무나도 휼륭한 최상의 한국 고유의 음식이었다.

<조태자 /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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