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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강해지고 더 현명해졌다

2020-12-30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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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자년 첫 날을 맞으며 우리 모두는 큰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시간에 물리적 매듭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1년 단위의 연대기적 출발은 언제나 다짐과 각오를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어준다. 삶이 항상 우리의 의지대로만 흘러가지 않고 소망 또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새해의 출발선에서 순탄하고 희망에 가득 찬 한해를 기원하고 기대했다.

그 누구도 팬데믹이라는 미증유의 사태 속에서 삶이 크게 위협받고,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어왔던 무수한 가치와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역시 삶의 본질은 불확실성이라는 사실을 팬데믹은 아주 잔혹한 방식으로 깨우쳐주었다. 우리는 희망에 부풀어 삶의 스크립트를 써내려가지만 절대자는 자신만의 구상과 연출방식으로 이를 뒤바꿔버리곤 한다.

이처럼 팬데믹이라는 먹구름이 우리의 삶을 뒤덮어 버렸지만 온통 어둡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먹구름에도 실버라이닝, 즉 흰 가장자리는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에도 긍정적인 측면은 있는 법이다. 물론 그것이 어떤 형태 어떤 의미인지는 각자의 처지와 상황, 그리고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팬데믹으로 집안에 갇히게 되면서 인터넷을 뒤지거나 서가의 낡은 책들을 꺼내 훑어보는 게 일과가 됐다. 그러다 다시 읽게 된 것이 문고판으로 나온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사람이나 책이나 달라진 맥락과 상황에서 보면 의미 또한 다르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이 소설이 그랬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천사 미하일이 인간세상으로 떨어져 하나님이 던진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미하일은 가난한 구두수선공 시몬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서 일하고 살면서 그 답을 찾아간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 특히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 것은 두 번째 질문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였다. 거들먹거리며 멋진 부츠를 주문하러온 부자에게 미하일은 그가 원한 부츠가 아닌 슬리퍼를 만들어 보낸다. 그날 저녁 그가 세상을 떠날 것임을 미리 본 것이다. 소설 속 부자처럼 우리에게는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아는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금년 초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부자를 닮아 있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염세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미하일은 가난한 구두수선공 시몬의 사랑을 통해 혼자서는 결코 이 세상을 온전히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팬데믹 시기에 절실한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각양각색의 이런 소소한 각성들은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달라진 환경과 여건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일상과 삶의 방식을 만들어 가고 있다. 항상 똑같이 돌아가던 쳇바퀴에서 떨어지게 되면 한 순간 당황하고 혼란을 느끼지만 곧 상황에 맞춰나간다. 인간이란 동물이 지닌 놀라운 인지적 적응력 덕분이다.

팬데믹에 따른 경제적 타격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처지에 맞춰 소비와 지출 습관을 바꾸는 방식으로 연말까지 버티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최소한의 생계를 꾸려 가는 데는 생각보다 큰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삶의 불확실성, 그리고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의존성 혹은 관계성에 대한 깨우침과 함께 어수선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 고독과 친구가 되는 법 배울 수 있었던 것 또한 역경이 선사해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팬데믹은 분명 고통스러운 집단적·개인적 경험이었고 기억이었지만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더욱 강해지고 더욱 현명해지고 더욱 끈끈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무형의 자산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불안정할 2021년의 세상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주어진 삶을 살아나가게 해 주는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팬데믹을 헤쳐 나가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두에게 니체가 들려주는 아포리즘보다 더 적절한 위로는 없을 것 같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해피 앤 세이프 뉴이어!!! .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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