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의과대학 정원을 늘리는 문제로 정부와 갈등을 빚은 한국 의료계가 파업을 벌였다. 파업까지 불사하는 데는 그 나름의 명분과 입장이 있었겠지만 코로나19가 무섭게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의사들이 벌인 파업을 곱게 바라보기는 힘들다. 앞으로 10년 간 의대 정원을 4,000명 늘리고 이 가운데 3,000 명가량을 의료혜택이 열악한 지방에서 근무토록 해 지역 간 의료격차를 해소하겠다는 것이 한국정부의 방침이었다.
인구 10만 명 당 의사 수를 보면 한국은 2.4명으로 OECD 평균인 3.5명에 크게 못 미친다. 별로 많지 않은 의사들이 지역적으로나마 균형 있게 분포돼 있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하다. 의료지표 가운데 ‘치료가능 사망률’이라는 것이 있다. 치료만 제 때 받았더라면 살릴 수 있었던 환자수를 말한다. 한국의 경우 충청도 어느 지역의 치료가능 사망률은 서울 강남보다 무려 3.6배가 높다.
어디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지가 나의 생명을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면 그것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라 별 평균수명이 말해주고 있듯 내가 어떤 나라에서 태어나는지는 미래 수명을 어느 정도 말해주는 중요한 예측지표가 된다. 하지만 ‘치료가능 사망률’이 말해주듯 같은 나라라고 해서 모두가 항상 같은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의료정책 저널인 ‘밀뱅크 쿼털리’ 최신호에 발표된 보고서는 이런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주고 있다. 이 보고서는 미국 50개 주의 평균 기대수명을 조사해본 결과 각 주의 정치적 성향이 주민들의 평균수명과 관계가 있음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주민들의 의료혜택을 확대하고 환경과 흡연, 그리고 총기 등과 관련한 규정을 강화해 온 진보적 주들의 주민 평균 기대수명은 남부와 애팔래치안 산맥의 보수적인 주들의 주민들보다 훨씬 길었다.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캘리포니아 주민 평균 기대수명은 81.3세였다.
특기할만한 점은 미국이 가장 평등했던 1960년대와 1970년 대 주별 평균 기대수명은 점차 비슷해지다가 레이건 등장으로 보수화 물결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 이후 급속히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진보적인 코네티컷 주의 경우 주민들의 평균 기대수명은 1980년부터 2017년 사이 무려 5.8년이 늘어 80.7년이 됐다. 그러나 대표적 보수주인 오클라호마 주는 이 기간 단 2.2년이 늘어 75.8년에 불과했다 이쯤 되면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 수명을 결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주별 정책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물론 정치다. 개개인의 유전적 요인과 건강습관을 우리의 삶의 길이를 결정해주는 1차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어떤 정치를 선택하고 어떤 정치인을 만나느냐 하는 것은 적어도 2차적인 요소라 할 만하다.
정치인들이 공공의료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또 자살과 총기사건 같은 사회적 질병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구성원들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과 수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유익한 정치’와 ‘해로운 정치’를 구분해 내는 것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담론을 처음 학술적으로 제기한 학자는 하버드 의대 교수를 지낸 저명한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이다. 그는 FBI의 통계 분석을 통해 지난 100여 년간 미국의 살인, 자살 등 ‘폭력치사’(그는 살인과 자살을 합쳐 이렇게 부른다)가 특정시기에 급속히 늘었다가 다른 시기에 줄어드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것이 늘어나는 시기는 공화당 집권과 겹치고 줄어드는 때는 민주당 집권시기임을 밝혀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폭력 치사로 인한 사망률은 민주당 때가 공화당 집권시기보다 인구 10만 명당 38.2명이 적었다. 의료적 사망뿐 아니라 ‘폭력치사’에 의한 죽음들 또한 당연히 기대수명에 영향을 미친다. 길리건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담은 책의 제목을 ‘왜 어떤 정치인들은 다른 정치인들보다 더 해로운가’(Why some politicians are more dangerous than others)라고 붙였는지 이해가 간다.
미국의 팬데믹 확산과 사망자 현황은 이른바 선진국들 가운데 최악이다. 인구 당 확진자와 사망자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마스크 착용 명령 내리기를 거부해 온 주지사들이 있는 군소 주(사우스다코다, 노스다코다, 아이오와 등)들이다. 결국은 ‘해로운 정치’가 문제인 것이다. 제 역할을 포기한 정치가 초래한 끔찍한 결과를 지켜보면서 길리건이 제기한 담론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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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