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진 11월의 자연은 올해도 여전히 아름답지만 술렁대고 북적이던 예년과는 달리 금년엔 한결 조용해져 다소 쓸쓸한 추수감사절을 맞고 있다.
수많은 미국인들의 오늘 저녁 식탁엔 코로나바이러스가 만든 빈자리가 있을 것이다. 여행 길 위험 경고로 타주에서 못 돌아온 성인 자녀들의 임시 빈자리일 수도 있고, 병문안은커녕 임종조차 못 지킨 부모의 영원한 빈자리일 수도 있다.
금년 초 코로나 죽음의 물결이 시작된 이후 미국인 사망자는 26만명을 넘어섰다. 그저 통계숫자가 아니다. 하나하나가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건네지 못한 채 서둘러 마감 당한, 그래서 더욱 큰 슬픔과 고통과 그리움을 남긴, 누군가의 사랑하는 가족이다.
앰뷸런스에 실려 가며 “천국에서 만나자”던 아버지의 빈자리를 지켜보는 40대 딸도, 함께 입원했다 자신은 회복하고 아내는 숨졌다는 60대 남편도, 어머니의 마지막을 셀폰의 페이스타임을 통해 지켜보아야 했던 30대 아들도 모두 같은 메시지를 전하기 원한다 : 무모하게 행동하면, 아니 자칫 방심하면 “악몽 같은 나의 현실이 당신의 현실이 될 수 있다”
가장 큰 가족 명절인 ‘땡스기빙’이 바이러스에 마비당하는 것은 대부분 미국인들에겐 난생 처음 겪는 변고이지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18년 추수감사절도 스페인 독감이라는 치명적 팬데믹의 와중에서 맞았다.
당시 팬데믹 상황은 지금 못지않게 심각했었다. 그해 3월에 시작된 스페인 독감은 첫 6개월에 7만5천명 사망자를 낸 후 잠시 주춤했다가 가을에 접어들면서 빠르고 강하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10월 한 달 동안의 사망자가 19만5천명에 달했다.
“추수감사절 축하는 대폭 축소하라. 집에 머물라. 안전을 지키라” - 한 세기 전 전국 각 로컬 정부의 지침도 2020년 보건당국의 가이드라인과 다르지 않았다. 자택대피령과 락다운도 시행되었고 감염자의 집 앞뒷문에 이를 표시하는 플래카드도 걸렸었다.
그러나 승리로 끝난 1차 대전 종전의 기쁨 속에서 맞은 당시 추수감사절의 분위기는 바이러스를 압도했다고 역사학자 낸시 톰스는 전한다. 너도나도 마스크를 벗어던진 채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했고, 교회와 성당, 유대교 사원은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신도들로 넘쳐났다.
승전의 기쁨에 방심했던 대가는 가혹했다. 독감은 연말연시부터 3차 물결로 온 미국을 휩쓸었고 결국 67만5천명의 사망자를 낸 후 여름이 되어서야 잦아들었다.
그때에 비하면 금년은 당국의 지침을 준수하는 분위기다. 역사에서 얻은 교훈도 크고 정부의 규제와 전문가들의 경고도 강력해졌다. 콜로라도 주지사는 “대규모 가족모임은 러시안 룰렛 게임과 같다”고 엄포를 놓았고 미시시피 주 의료협회장은 “대규모 추수감사절 디너 후엔 소규모 크리스마스 장례식을 준비하라”고 경고했다.
지난 며칠 공항이 여행객으로 붐비긴 했지만 그래도 미국인의 61%는 금년 추수감사절엔 여행을 자제하고 가족 디너 규모도 줄이겠다고 말했다. 악시오스-입소스 여론조사 결과다.
이 같은 추수감사절 ‘셧다운’이 감사와 선의까지 셧다운 시킨 것은 아니다. 미국인들의 자선 등불은 코로나의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있다. 2019년 4,500억 달러로 사상 최고를 기록한 미국인들의 자선 기부는 금년 첫 4개월 동안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16%가 늘었다.
수요도 급증했다. ‘식품 불안정’이란 용어로 분류되는 배곯는 미국가정은 평소 전체의 10.3%인데 팬데믹으로 상황이 악화된 금년엔 23%로 늘어나, 2,6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미 전국 식품배급소마다 길게 늘어선 자동차 행렬이 이를 반영한다. 예년엔 1일 45만 파운드의 식품을 배급했던 휴스턴 푸드뱅크의 경우 요즘은 1일 80만 파운드를 배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는 오늘 저녁 규모도, 분위기도 제각기 다른 추수감사절 식탁에 앉을 것이다. 감염 위험을 무릅쓴 대가족 디너도 있을 것이고, 빈자리가 선명해 고요한 저녁이나, 집에 돌아가지 못해 평소와 다름없는 ‘나 홀로 식사’도 있을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우울한 그림자가 서성대는 식탁에서 예년처럼 ‘우리가 받은 축복을 세어보며’ 감사를 드리기는 쉽지 않을지 모른다.
감염자가 급증하면서 LA는 야간 통행금지령에 더해 다시 식당의 야외영업을 중단시켰다. 규제는 식당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업소들이 또 폐업 위협에 직면할 것인가.
단조로운 일상에서 우리를 설레게 했던 대소사들은 취소되거나 미루어졌다. 졸업식을 포기하고 결혼식을 연기해야 하는 이 지루한 뉴노멀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달라이라마가 일러준 만족에 이르는 길을 기억할 때다.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감사다. 감사는 그 자체가 잃었던 자신감과 행복감을 되찾게 하는 생기발랄한 감정이다. 이미 가진 것, 그래서 감사할 일은 팬데믹의 와중에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부터 시작해 누구에게나 많다.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온 백신개발과 경제 회복세는 긴 터널 끝의 빛으로 다가온다. 새해부턴 보다 상식적인, 보다 안정적인, 보다 친이민적인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감사할 일이다.
내년엔 더 이상의 빈자리 없이 가족 모두가 안전하게 함께 모일 수 있다는 희망이 오늘의 다소 쓸쓸한 저녁을 따뜻하게 위로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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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