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440년 만에 빛을 본 조선시대 상업신문

2020-10-29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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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 (13) 민간인쇄조보

▶ 세계 최초의 신문과 선조의 언론 탄압

440년 만에 빛을 본 조선시대 상업신문

세계최초 활자조판 상업용 신문 민간인쇄조보의 모습. 선조 10년 1577년 11월24일 날짜의 민간인쇄조보 내용 중에는 인성왕후 공의왕대비 관련 뉴스가 언급되었는데, 공의전(인성왕후 공의왕대비를 모신 궁)의 쾌유를 비는 기도가 양진(楊津, 양주에 있는 광나루) 에서 있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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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전 미령교(공의전이 몸이 좋지 않아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선조실록에는 11월29일에 ‘공의전이 낫지 않자 대신들에게 다시 기도하도록 전교하다’는 제목에서 선조가 대신들에게 전교하기를 “상전의 병세가 위중하다. 기도는 이미 했지만 다시 기도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내마음이 망극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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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7년 11월6일 내용 중에는 공의전(인성왕후 공의왕대비를 모신 궁) 약방제조 문안 기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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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쇄조보 내용과 조선왕조실록 내용이 일치되는 내용. 1577년 11월15일 기사에는 ‘치우기 소재 부득’, 즉 밤하늘에 나타난 전쟁신 치우기(혜성)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정축년(1577) 치우기(혜성) 관찰 기록은 그 당시 최초민간신문인 민간인쇄조보,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석담일기 등에서 각각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기록이다. 16년 후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1593년 8월10일 기록에는 “왜적의 동향, 혜성의 변고, 풍수, 환도, 명군의 유병 문제를 의논하다” 주제로 “지난 정축년에 (1577년) 치우기(蚩尤旗)가 나타났는데 그 별이 매우 장대하였다. 이 별이 기성(旗星)과 미성(尾星)에서 나와 우성(牛星)과 두성(斗星)에서 사라졌는데, 기성과 미성은 연(燕)의 분야(分野)이고 우성과 두성은 월(越)의 분야이므로 조선이 침입을 받고 왜적이 마침내 패망할 것이라고 했다 하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매우 신묘(神妙)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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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활자조판 상업용 신문 민간인쇄조보를 발견한 영천역사박물관 관장 지봉스님은 인종의 태를 모신 태실이 경상북도 영천 은해사 뒷산에 있는 것을 은해사 부주지로 재임할 때부터 알고 있었기에, 440여 년만에 기적같이 발견된 민간인쇄조보에 실린 인성왕후 공의전 소식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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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체로 국가에서 매일 발행하던 조보(공고문, 위 사진 오른쪽)는 학식이 높은 사대부들도 읽기 힘들었기에, 금속활자와 목활자로 인쇄한 민간인쇄조보(위 사진 왼쪽)을 “각관청과 외방 저리(서울주재 지방 관청 서리)와 사대부에게 파니 받아보는 사람들이 모두 편리하다고 생각하였다” 라고 조선시대 대학자였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는 석담일기(아래 사진)에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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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2대 임금 인종대왕의 태를 봉안한 태실은 경상북도 영천 은해사 뒷산에 1521년 조성됐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주변 산이 병풍처럼 알봉산을 둘러싸고 있는 명당이다. 태실이란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태반과 탯줄을 묻는 석실(石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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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일제가 전국 각지에 있는 조선왕조 태실 항아리를 경기도 서삼릉으로 옮겼다. 어두운색의 석물들은 예전 것이고, 연꽃 모양의 석기둥을 포함해서 새롭게 보이는 석물들은 복원된 부속들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99년 이후 방치된 태실을 발굴 조사하여 인종대왕 태실은 2007년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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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16일 경북 영천 임고서원에서 ‘민간인쇄조보 심포지엄’이 국민대 신채용 연구원의 사회로 열려 선조가 민간인들이 발행했던 세계최초 활자조판 상업용 신문 민간인쇄조보 출판을 금지하고, 금속활자와 목활자를 모두 압수한 언론탄압 사건을 토론하였다. 종합토론 참여 학자들. 왼쪽부터 군사편찬연구소 김경록 연구원, 부경대 김윤미 교수, 영천역사박물관 관장 지봉스님, 전북대 김경래 교수, 한국고전번역원 안광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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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쇄조보 심포지엄 참석자들은 체온을 확인하고, 명단에 전화번호와 실명을 기입하고, 한 테이블에 한 사람만 앉는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행사였다. 행사 직후 임고서원 박춘재 사무처장과 관계자들이 강당을 철저히 소독, 청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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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역사 중 하나는 선조가 궁을 버리고 피난을 간 사건이었다. 임진왜란 중 왕이 백성과 나라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분노한 백성들은 1592년에 경복궁을 불질러버렸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왕실의 역사와 왕의 행적을 구체적이고 자세히 기록한 것인데, 이때 불타버려 부실하고 빈약한 선조실록(宣祖實錄)을 보완한 선조수정실록은 화재로 소실돼 빠진 중요한 역사를 다시 기록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조선시대 대학자였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석담일기가 포함돼 있다. 율곡이 조정에서 펼쳐진 경연(經筵)에서의 강연과 정계 동향 등을 일기로 엮은 경연일기는 생생한 기록들에다 본인의 평론까지 포함시켜 선조 때의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남아 있다.


1577년 11월28일 선조가 민간인들이 활자로 인쇄한 신문 민간인쇄조보를 보고 크게 진노했다고 조선왕조 선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조보(朝報)를 인출(인쇄)하기 위해 새긴 글자(활자)는 모두 몰입(沒入)하고 인출한 사람들은 의금부에 내려 추국하라."

이미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 능력을 보유한 우리 민족이었지만, 선조 때만 해도 활자 인쇄를 통한 정보 전달은 국가와 사찰에서만 독점하고 있었다.

왕실과 중앙정부가 매일매일 필사본(붓으로 쓴 공고문)으로 발행하는 엄청난 양의 국가 독점 관영지인 조보는 전국 각 지역에 파견된 중앙관리와 지체 높은 사대부들에게 중앙의 소식과 그 지역과 관련성이 있는 필요한 내용이 모두 필사본으로 복사되어 전달되고 있었다.

그때 필사체로 국가에서 매일 발행하던 조보(공고문)를 의정부(국무조정실·국무총리비서실)와 사헌부(감사원·헌법재판소)에서 허락을 받고 금속활자와 목활자로 인쇄한 것이 민간인쇄조보다.

민간인쇄조보는 국가 인쇄시설이 아닌 곳에서 자체 활자를 만들어서 상업적으로 팔았고, 매일 발행했으며, 관에서 나오는 모든 내용을 그대로 쓰지 않고 독립적으로 간행(편집)했다고 하니 현대의 상업적 일간지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어 세계 최초의 민간 상업신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율곡은 "각 관청과 외방 저리(서울주재 지방 관청 서리)와 사대부에게 판매하니 받아보는 사람들이 모두 편리하다고 생각하였다"고 기록했다.

신문이 역사의 첫 페이지를 쓴다는 언론의 정의를 1577년 당시 선조는 명확하게 이해했는지, 민간인쇄조보의 간행을 중지시켰다. “...두어달 뒤 상(선조)이 우연히 관보를 간행 하는 것을 보고 노하여 이르기를 ‘조보를 간행하는 행위는 사국(史局)을 사설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만약 다른 나라에 유전(流傳)되기라도 한다면 이것은 국가의 나쁜 점을 폭로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선조실록 과 율곡의 석담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선조가 민간인쇄조보 발행 관련자들을 역모죄를 조사하는 “의금부에 가두고 고문하여 주모한 사람을 추궁하였는데, 그 사람들은 이것으로 생활의 밑천을 삼으려는 것에 불과하였고 사실 주모한 사람은 없었다.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되자 형을 정지하자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대역부도의 법으로 처리하라 하고, 금부에서 과중하다고 아뢰니 그보다 한 단계 낮은 법률을 적용해서 모두 먼 지방에 귀양 보내었다”라고 율곡은 기록하고 있다.


조정 소식과 한성 및 경기 지역의 소식을 담아 활자조판이라는 인쇄 기술을 이용하여 상업용 목적으로 민간인쇄조보 신문을 독립적으로 발행했다는 것은 임금이 국가의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있었던 왕의 나라 조선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사건이었다.

1577년 조선왕조실록과 율곡의 석담일기에 기록된 민간인쇄조보 신문은 19세기 우리 근대 신문의 태동기와 일제감점기의 수많은 학자들이 찾고 또 찾던 인쇄물이기도 했다.

고서 ‘성리대전서’ 표지 속에 숨겨져 있던 1577년 민간인쇄조보 9쪽이 대한민국 인터넷 고서 경매 사이트에 나왔을 때 아무도 그 가치를 알지 못했지만, 영천역사박물관의 지봉스님은 조선 제12대왕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 공의전과 1577년(정축년) 하늘에 나타났다고 기록된 치우기(혜성-1577년 11월15일 기사)를 보고 이 신문의 가치를 바로 알아봤다고 한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지봉스님은 삼십이관음 응신도, 즉 인성왕후가 30세에 죽은 남편 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영암 도갑사 금당에 봉안했다가 임진왜란 때 도난당한 세로 235cm, 가로 135cm 그림을 통해서 인성왕후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인종이 태어났을 때 나온 태를 모신 태실이 경상북도 영천 은해사 뒷산에 있는 것을 은해사 부주지로 재임할 때부터 알고있었기에, 민간인쇄조보에 실린 인성왕후 공의전 소식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민간인쇄조보 인쇄에 사용된 금속활자와 필요에 따라 만들어 썼던 목활자를 모두 압수하고, 관련자 30여 명과 그들의 가족까지 귀양을 보낸 선조의 분노, 그리고 민간인쇄조보 발행에 대한 우려는 440여 년 후 기적같이 발견된 민간인쇄조보의 내용에서 엿볼 수 있다.

이 민간인쇄조보에는 1515년 3월10일 태어나서 30세의 한창 젊은 나이인 1545년 8월7일 사망해 왕위 재임 기간이 단 8개월 7일간으로 조선왕조 역사 중 가장 짧았던 제12대 왕 인종의 비극적인 삶이 나타나 있다.

아버지 중종의 사망 하루 전에 조선의 왕이 되었다가 의문의 죽음으로 느닷없이 세상을 뜬 인종의 미망인 인성왕후 공의왕대비의 건강 소식이 1577년 11월 민간인쇄조보 1면을 장식하고 있다.

조선의 제14대 임금 선조는 중종과 후궁 사이에서 출생한 덕흥대원군의 아들로 미천한 신분 출신으로, 왕이 되는 과정에서 숙부인 인종이 그의 후견인이었다. 인성왕후는 인종의 이복동생이자 조선의 제13대 임금인 명종, 그리고 12세 때 왕좌에 오른 명종을 8년간 수렴청정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 집안의 정치적 살인사건이었던 을사사화(파평 윤씨 간의 내부 대결)의 피해자인 인종의 외삼촌 윤임의 명예회복을 선조에게 요청하였다. 그런 인성왕후가 30살에 남편 인종을 잃고 63세로 죽어가고 있던 1577년 11월24일에 인성왕후의 소식을 담은 민간인쇄조보는 선조한테 많은 부담이었던 것이다. 인성왕후는 선조가 인종의 외삼촌 윤임의 명예회복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난 이후인 1577년 11월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선조가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간인쇄 상업용 일간지를 제작한 관련자들을 처벌했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언론 탄압의 첫 사례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선조가 "30여 인을 잡아 가두고 누차 형신을 가한 뒤 결단하여 차등 있게 사배(徙配)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놨다. "조정 관보를 간행한 것이 처음부터 간사한 모의가 아니고 우매한 사람들이 사소한 이익으로 살아가려는 목적이었다. 당초 의정부와 사헌부에 품신하자 모두 간행할 것을 허락하였으니, 과실은 두 관청에 있는 것이다. 이 어찌 어리석은 백성만 죄를 줄 것인가. 두 관청에서 머뭇거리기만 하고 말을 하지 않아 어리석은 백성이 형벌을 당하고, 임금은 백성을 잊는 조처를 행하도록 하니, 겁만 먹고 나약하여 의리가 없는 자들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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