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며칠만 땜빵을 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있다고 했다.
C님은 신문기자 출신으로 팔십대 중반이 넘었지만 예사롭지 않은 언어 구사력에 난 홀려 있었다. 그 분의 남다른 표현력을 적어놓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될 정도였다.
그 분을 돌보시던 간병사께서 타주에 사는 딸을 방문한 관계로 3일을 C님과 보내게 되었다.
노인 아파트에 혼자 사시는 그 분의 문지방을 넘자마자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하고 묻자 그 분은 “특별히 도와 줄 것은 없고 산수 공부나 같이 하자”고 하셨다.
어안이 벙벙할 새도 없이 허공을 질러 군인 담요 한 개가 날아와 방바닥에 깔리고, 화투가 담요 위로 던져졌다. 그 날 나는 고스톱과 홍단, 청단, 초단을 배웠고 그렇게 해서 종이 쪽지에 점수가 날 때마다 숫자를 적는 산수 공부를 하게 되었다.
“늙으면, 치매가 제일 무서워. 이렇게 산수 공부 열심히 해야 해.” 밥 때가 되었다. 저녁을 차려 드리려 부엌으로 들어가자 C님이 내 등을 손바닥으로 치시며 말을 하셨다.
“처음 온 집의 살림을 뭘 안다고 깝죽거려. 비켜. 오늘은 내가 차려 줄게. 그냥 가만히 있어.” 그렇게 해서 그녀는 만들고, 나는 보조해서 식탁에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난 미국에 20년째 살고 있지만 그렇게 맛있는 저녁 밥상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려워하지 마. 둘러봐봐. 할 게 뭐 있어. 깨끗하잖아. 나랑 놀아 주는게 집안일 해주는 것 보다 더 나아.”
그녀에게 약 드실 시간임을 알려드리고 설거지 후 쓰레기를 비웠다. 그렇게 5시간은 지나갔다. 3일 내내 난 그녀와 산수 공부에 매달려야 했다. 그녀의 만류에도 빨래를 해드리고 집안 청소를 해드렸다.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어머니 집처럼 이렇게 편하게 일하는 데는 없어요.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소리 들어야 했다. “남의 밥 그릇 탐내지 말고, 네 밥그릇이나 잘 지켜. 그 이는 나랑 같은 동네여서 5분이면 오고, 너는 하이웨이 타고 30분이나 오잖아.”
마지막 3일째 되는 날, 난 섭섭한 마음에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팩에 들어있는 냉면 두 개를 사다 드렸는데 핀잔만 들어야 했다.
“넌 왜 시키지 않은 일을 하니? 다시 집에 가져가. 우리 집 냉장고 봤잖아. 음식으로 가득 찬 것. 이렇게 늙으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쌓이는 것은 음식 밖에 없어. 혼자서 먹으면 얼마나 먹겠니? 여기서 20년 살았어. 친구들이 많았는데, 이제 다들 떠나고 음식 나눠 먹을 친구들도 점점 줄어들어.”
함께 있는 사람이 편하고, 즐거우면 시간이 빨리 간다는 것을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기 직전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 하느님께 기도 중이야.” “무슨 기도요?” “세상 떠나기 전에 아들 집에 들어가 한번 살게 해 달라고.” 그랬구나. 외로우셨구나. 가슴이 미안함으로 짠해져 돌아서는데 그녀가 씩씩하게 외치는 소리가 내 등에 와 박혔다.
“안 나간다. 잘 가. 나 산수 공부해야 해. 근데 산수 공부는 둘이서 해야 더 좋은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반성을 하였다. 조금 더 산수 공부를 열심히 해 드릴 걸…. 조금 더 그녀의 외로움을 감싸 드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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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 밀스테드 / 로럴,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