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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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트럼프

2020-10-08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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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트럼프 대통령이 퇴원 하루 만에 추가경기부양안 협상을 전격 중단시켰을 때 민주당 못지않게 깜짝 놀란 것은 트럼프 재선 진영인 듯하다. 팬데믹으로 고전하는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줄 부양안 통과는 백악관과 민주당이 앞 다투어 지지를 강조해 왔고, 재선에 나선 양당 의원 모두가 선거구에 ‘선물’로 들고 가려고 기다려온 최우선 과제였다.

바로 사흘 전엔 트럼프 자신이 입원 중 트윗으로 양당 지도부에 합의안 선거 전 통과를 촉구했고, 제롬 파월 연준의장이 불충분한 지원이 경기회복에 미칠 위험성을 경고한 것은 중단 지시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그런데 트럼프 스스로 판을 깨버린 것이다.

트럼프 캠페인의 한 자문은 “도대체 백악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마크 메도우스 비서실장은 어디 있는가?”라며 경악했고 일부 트럼프 참모들은 얼굴에 강펀치를 얻어맞은 듯 너무 황당해 했다고 악시오스는 전한다.


대법관 인준에 올인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이기고 있는’ 자신의 파워 과시를 위해? 지지층의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등 갑작스런 결정 배경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는 중에 또 몇 시간 후엔 현금지원 등 몇 가지만 합의해 보내라고 트윗하는 통에 코로나 치료용으로 복용한 스테로이드 부작용 의심까지 제기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온갖 악재로 전전긍긍하는 캠페인 참모들을 더욱 아연케 한 것은 “코로나19를 겁내지 말라…독감보다 훨씬 덜 치명적이다”라는 대통령의 무책임한 감염 소감이었다.

참모들은 트럼프의 코로나19 확진 판정이 정치적 플러스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체험을 통해 얻은 교훈으로 팬데믹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국민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면모를 보이면서, 최대 약점인 코로나19 대응도 자연스럽게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교훈을 얻기는커녕 수위 높인 팬데믹 망언으로 분노와 비난만 더욱 거세졌다.

트럼프의 무리수는 출구가 안 보이는 위기에 직면해 조급해진 그의 절박한 상황을 반영한다.

선거 막바지 10월은 그가 별러 온 반전의 시기였는데 바이러스의 기습을 당한 것이다. 코로나19의 새로운 핫스팟, 백악관에 갇힌 트럼프가 선거 유세도, 모금파티 참석도 할 수 없어 자금사정이 나빠진 그의 캠프는 TV광고와 자체 여론조사도 줄였다고 LA타임스는 전한다.

지난 주 대선후보 토론과 코로나19 확진판정 이후 이번 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지지율 격차는 더욱 암담하다. 월스트릿-NBC뉴스 조사에선 53%-39%의 14포인트 차이로, CNN조사에선 57%-41%의 16포인트 차이로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에게 크게 뒤지고 있다.

“선거인단 270명 확보의 길이 다양한 바이든과 달리 트럼프는 재선 가능성의 입지에라도 서려면 앞으로 몇 개의 경합주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선거 전략가 덕 소스닉은 지적한다. 그런데 전국지지율만이 아니라 2016년 트럼프가 승리했던 경합주인 펜실베이니아와 미시간에서도 바이든이 상당한 차이로 앞서는 중이다.


역전을 위한 리셋의 기간은 딱 25일 남았다. 신뢰도가 바닥인 트럼프에겐 고도의 전략이 필요한 난제다. 4년 전과는 달리 공포전략은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 그가 경고하는 ‘바이든 사회주의 정부’의 위험성은 설득력도 없지만 계속되는 ‘트럼프 뉴스’에 묻혀 어필할 겨를도 없다.

현직 대통령의 재선은 그의 업적에 대한 국민의 평가다. 금년의 평가대상인 위기대응이 이미 실패로 지적되고 있는데 더해, 만사를 자신에 대한 것으로 만드는 트럼프의 자기중심적 접근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왔다고 LA타임스는 분석한다.

트럼프 옹호자들도 대통령의 자아도취 정치엔 고개를 흔든다. 보수 라디오 진행자 벤 샤피로는 “트럼프가 패배한다면 그 자신 때문이다. 바이든에 대항하는 캠페인은 어렵지 않다. 트럼프가 뉴스 조명에서 벗어나 바이든에게 조명이 가도록 하면 되는데 그걸 트럼프 자신이 거부하고 있다”며 좌절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트럼프의 자아도취적인 허풍과 과장이 그의 핵심지지층을 열광시키는 요소인 것 또한 사실이다.

더해가는 팬데믹 경시를 비롯한 트럼프의 극단적 승부수를 낙관적으로 보는 전문가는 드물다. 바이러스 감염 후 트럼프의 행보를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는 여론도 63%에 달한다. 그러나 선거 결과에 미칠 영향은 아직 불확실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두 후보의 완전히 뒤바뀐 행보다. 오랜 자택 지하실 칩거로 트럼프의 조롱을 받았던 바이든은 경합주 곳곳을 누비며 막판 질주 유세에 나섰고, 코로나 위험을 무시하고 여름내 유세를 강행했던 트럼프는 코로나에 발목이 잡히면서 모든 일정을 중단했다.

당장 가장 큰 변수는 대통령의 정확한 병세이지만 백악관은 구체적 병세만이 아니라 감염경로도, 백악관 내 확진자 숫자도 알려주지 않으니 추측과 루머만 무성하다.

가뜩이나 잇단 변수의 출몰로 혼란을 거듭해온 대선 정국이 더 깊은 안개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고 있다. 무절제한 대통령이 필사적인 재선투쟁 가도에서 또 어떤 무리수를 둘지, 그 무리수가 국민들에게 또 어떤 고통을 줄지…‘트럼프 피로증후군’은 이미 비등점에 달했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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