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칼럼쓰기가 아니었다면 TV를 끄고 싶었다. 29일 저녁의 2020년 첫 대선후보 토론은 인신공격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진흙탕 싸움이어서 지켜보는 것조차 불편하고 피곤했다. “미국을 겁주는 호러 쇼”라는 USA투데이의 표현이나 “수치(disgrace)” “X 쇼(shit show)”라는 미 언론들의 혹평이 과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토론 전 자신이 동의했던 규정을 무시한 트럼프 대통령의 끊임없는 끼어들기로 시작된 혼란스런 난타전은 진지한 정책 대결이나 국가 비전의 제시는커녕 선거결과 불복에 대한 불길한 경고를 남긴 채 어색하게 끝났다.
토론 전 거론된 관전 포인트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두 가지였다 : 첫째, 트럼프는 반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둘째, 바이든은 트럼프 도발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트럼프 진영이 퍼트리는 ‘치매’설을 일축하고 인지능력 건재를 입증할 수 있을까.
금년 대선은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대법관 공석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이변’에도 흔들림 없이 민주당 후보 조 바이든의 지지율 리드가 지속되어온 ‘안정된’ 판세다. 90분간의 토론이 판세를 움직일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 높지 않았다.
그러나 선거가 한 달 남짓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토론에 약한’ 바이든과 나란히 서서 전국에 자신의 화려한 순발력을 과시할 수 있는 첫 토론 무대는 트럼프에겐 선거의 반전을 꾀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 중 하나였다.
트럼프는 그 기회를 놓쳤다. 어쩌면 스스로 버린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막무가내로 계속 룰을 어겨가며 집요하게 토론의 흐름을 방해할 수는 없다. 그의 끼어들기는 상대방 흠집 내기에 별 효과도 없었다.
보수언론 월스트릿저널 조차 “트럼프는 바이든을 흔들기 원했지만 너무 잦은 끼어들기로 바이든이 실수할 만큼 길게 말하지도 못하게 막아버렸다”면서 트럼프가 하도 왔다갔다 주제를 바꿔가며 말하는 통에 그가 무슨 말로 바이든을 공격하는지도 알기 힘들었고 자신의 최대 강점인 경제관련 토론에도 집중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는 백인우월주의자들에 대한 규탄도 회피했고, 선거결과 확정까지는 승리선언을 않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갈팡질팡에도 그의 핵심 지지층은 열광적 환호를 보낼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재선 위해 반드시 필요한 유권자들의 마음을 이번 토론으로 사로잡기는 힘들 것이다.
공화당은 트럼프에게 핵심지지층에만 집중 말고 표밭 확대를 위해 낙관적 어젠다 제시로 교외지역 중도 유권자들에게 어필할 것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수천만이 지켜보는 첫 토론에서 트럼프는 그 반대를 택했다. 자신이 핵심지지층에만 집중한다는 것을 재확인시켜 준 셈이다.
이번 토론의 승자를 굳이 고르라면 바이든이다. 끊임없는 트럼프의 도발에도 대체로 평정을 유지하며 자신의 핵심 주제에 충실했고, 트럼프 아닌 카메라를 주시하며 시청하는 유권자들을 향해 “반드시 투표하라”고 호소를 하고, 바이러스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를 전하기도 했다.
유권자들에게 새 정보를 주지 못한 이번 토론은 87%가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선거 판세에 별 변화를 못 줄 것이다. 현상유지만 되어도 선두주자 바이든의 사실상 승리라 할 수 있다.
참모진들이 가장 우려했던 아들 헌터 바이든에 대한 트럼프의 공격에도 바이든은 무너지지 않았다. 트럼프가 헌터의 우크라이나 관련 비리 의혹을 넘어 과거 마약복용까지 건드렸지만 바이든은 “내 아들은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마약문제를 겪었다. 극복해낸 그가 자랑스럽다”며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면모를 성공적으로 부각시켰다.
트럼프가 더 ‘스마트’하게, 더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며 트럼프의 팬데믹 대응 실패를 공격하다가 “당신은 거의 꼴찌로 졸업했지, 내게 스마트란 말은 꺼내지도 마, 조, 당신은 스마트와는 거리가 멀어”라며 멍청하다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새 보수 대법관 인준이 초래할 오바마케어 폐지의 위험을 경고하며 트럼프의 헬스케어 플랜 부재를 지적했고 트럼프 집권 하에서 미국은 “더 약해지고, 더 아파지고, 더 가난해지고, 더 분열되고, 더 폭력적이 되었다”면서 이번 선거가 현 정권에 대한 심판임도 상기시켰다.
바이든도 잘한 것은 아니다. 처음엔 참으려는 듯 했지만 곧 함께 진흙탕에 뛰어들어 “입 좀 닥치시지?” “계속 지껄여라” ‘저 어릿광대와는…“등의 막말을 서슴지 않았고, 대법관 확대 지지여부에 대한 답변을 회피했다. 자신의 기후변화 정책을 명쾌하게 설명하지도 못했고, 트럼프와는 다른 자신의 팬데믹 대응책 등 구체적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인지능력 테스트는 거뜬하게 통과했다. 일관성 있는 주장을 비교적 논리정연하게 펼쳤으며, 민주당이 극좌로 기운다는 공격엔 “지금은 내가 민주당”이라고 강력하게 받아쳤다.
트럼프의 마구잡이 공세를 아예 무시할 수도, 한 없이 참기만 할 수도 없는 바이든에겐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29일의 첫 격돌은, 팬데믹의 위협 속에서 무너지는 경제, 거듭되는 인종차별과 재연되는 항의시위에 불안해하며 하루하루를 버티어내는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외면한 ‘최악의 토론’이라는 오명에서 한동안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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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