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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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클래식] 브람스와 베토벤 교향곡 10번

2020-09-18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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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브람스와의 만남은 종로의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에서부터였다.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래지만) 그 당시 음악 감상실의 DJ는 브람스 팬이였는지 늘 브람스만 신청하면 곧장 틀어주곤 했다. 베토벤이라든가 차이코프스키 ‘1812년 서곡’ 같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음악을 한번 신청해서 들을라치면 거의 종일을 기다리다시피 해야 했지만 브람스만큼은 ‘대학축전 서곡’, 교향곡, 실내악곡 할 것 없이 백발백중 아무 때나 OK였다. 누군가 말하기를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 중 도꾸가와를 좋아한다 하면 무서운 놈, 히데요시를 좋아한다 하면 이상한 놈, 노부나가를 좋아한다 하면 대체로 통한다 하더니 클래식에도 이런 법칙이 있는가 보다 그때 느꼈다. 아무튼 그 당시 음악 감상실에서 브람스라는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는데 지금도 브람스를 좋아한다고 하면 클래식계에서는 대체로 통하는 편이다. 바그너는 무서운 놈, 베토벤이나 차이코프스키를 좋아한다고 하면 좀 이상한 놈 취급받을지도 모르지만(너무 대중적이기 때문에), 아무튼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브람스는 클래식의 아이콘으로 통하게 됐다.

나는 브람스를 좋아할까? 요즘 한국에서 ‘브람스를 좋아하십니까?’라는 TV 드라마가 방영 중에 있다지만 누군가 브람스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떨까? 나의 경우는 왠지 초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브람스야말로 음악이 다가올 때 피하지 않았고 또 일부러 다가가기 위해 애쓰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작곡가였던 것 같다. 그러면 당신은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혹자는 이렇게 결론 맺을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브람스를 좋아할 때가 정말 많기 때문이다. 교향곡 4번을 비롯한 그의 교향곡 4개, ‘독일 레퀴엠’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레나데’,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트리오 등은 정말 좋아하는 작품들이다. 특히 브람스가 남긴 4개의 교향곡은 늘 듣는 편인데 그중 1번과 4번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교향곡 1번은 소위 ‘베토벤 교향곡 10번’이라고도 불리는 작품인데, 브람스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곡은 아니지만, 베토벤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어딘가 애처롭고 또 장중한 4악장의 뿔피리 소리도 너무나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마도 브람스가 남긴 가장 장렬한 작품으로서, 시합으로 말하자면 감투상 감인데 실내악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브람스가 교향곡 작곡가로서 가능성을 엿보인 대단한 작품일 뿐 아니라 탄탄한 구성, 선율미 그리고 작품성에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가장 브람스답다고는 할 수 없지만, 베토벤과는 다르면서도 어딘가 베토벤 못지않은 밀도와 형식, 장엄한 선율미가 압권이다. 물론 브람스의 내면 세계도 적절히 녹아 있고 ‘브람스를 좋아하십니까?’ 하는 그런 반어적인 질문 없이도 누구에게나 어필하는, 브람스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작품으로 가히 베토벤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브람스는 화려한 선율미를 매우 껄끄러워 했는데 그것은 브람스의 소박한 성격 때문이었겠지만 그것은 동시에 브람스가 오케스트라와 같은 스케일 있는 심포니 작곡가로 성장하는데 장애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은 이러한 브람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꼽아 손색없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더욱 이 작품이야말로 이 가을에, 우리의 삶이 잔인할수록, 늘 먼 하늘 가에 머물며, 바람에 날려가듯 가볍고, 강물이 흘러가듯 단조롭고도 부담 없이, 마치 꿈꾸는 코스모스처럼, 클래식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심포니스트(교향곡 작곡가)들에게 운명적으로 비정했는데 그것은 꼭 9개의 교향곡으로 유명했던 베토벤이 청각 장애로 사망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차이코프스키, 슈만 등 다른 위대한 심포니스트들도 모두 미쳐 죽거나 외로운 독신으로 고독한 인생을 마감했기 때문이었다. 심포니는 왜 운명적으로 심포니스트들에게 비정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절대 아름다움이라는, 힘든 열매에 대한 사투도 있었겠지만, 교향곡이야말로 만인에게 드러내야만 하는 자기 자신의 전부, 아름다움과의 사투, 절망과 고독의 산물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오직 혼자서 걸어야 하는 외로운 홀로 걷기… 아름다움으로만 헤쳐나갈 수 있는 절망의 강… 당신은 단 한 번이라도 이 세상에서 남에게 뜨겁고 감동적인 존재가 되어본 적이 있습니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성공’이냐 ‘실패’냐 ‘감동’이냐 ‘절망’이냐… 베토벤 이후 모든 심포니 작곡가들이 새로운 물줄기를 트기 위한 자기만의 사지에서 헤매고 있을 때 브람스 또한 20년이란 세월을 스스로에 갇혀 헤매고 있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저 소리도 아닙니다. 베토벤과 바그너가 할퀴고 간 낭만주의의 텅 빈 자리에서 브람스가 남길 수 있는 흔적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수천 번 깨지고 부서지면서 비로소 탄생한 한 줄기 언어… 심포니 1번이 완성되었을 때 지휘자 한스 폰 뵐로는 베토벤의 교향곡 10번이 탄생했다고 외쳤다고 한다. 브람스 또한 격한 성공의 환희… 그리고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 감동하여 교향곡 2번을 단 1년 만에 완성하는 격정적 고무감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시내가 강물을 만들고 바다를 이루고, 둑이 터지듯 힘차게 터져 나온 또 다른 교향곡의 부활… 그 합창은 인류 역사에 또 다른 교향악의 무지개, 말러와 시벨리우스,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심포니스트들이 터져 나오는 계기를 안겨주기도 했다. 모두 4악장으로 된 이 곡은 특히 4악장 클라이맥스에서 슈만이 외쳤던 알프스의 뿔피리 소리… 그 환희의 고함이 베토벤 시대의 종말과 후기 낭만주의를 여는 장엄한 한 장으로서, 처연한 감동을 준다. <연주 시간 45분>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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