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사시대 한반도는 고인돌 왕국이었다

2020-09-0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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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 (6) 고인돌

선사시대 한반도는 고인돌 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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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한반도는 고인돌 왕국이었다

강화도에 있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북방식 고인돌. 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137호) 탁자식 덮개돌의 무게가 약 53톤이다.

선사시대 한반도는 고인돌 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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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에 있는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 도산리 지석묘(道山里支石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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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 있는 고인돌 덮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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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죽림리에는 탁자형과 바둑판형, 그리고 그 중간 과도기적인 지상석곽형(地上石槨形) 등 다양한 지석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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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고대 바위를 자르는 채석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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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성송면 무송리 논에 있는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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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성송면 내원리 인가 앞뜰에 있는 고인돌.

선사시대 한반도는 고인돌 왕국이었다

선사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살던 곳은 잘 나가던 곳이 분명하다. 고인돌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모여 있기 때문인데, 이는 바로 우리 선조들이 자리 잡은 땅이 잘 나가던 곳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고인돌은 전 세계에 6만여 개가 있는데 이중 4만에서 4만5,000여 개가 우리 땅에 있다. 다양한 고인돌이 모여 있는 고창, 화순, 강화도의 지석묘들이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인돌이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쓰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우리 선조들이 자리 잡은 땅은 일찍이 농사를 통해서 넉넉한 식량이 인구 증가를 가능하게 하고, 노동력을 관리하는 조직적인 사회와 문화가 정착되었기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고인돌을 세울 수 있었다고 본다.

고창 죽림리의 지석묘 앞으로 고창천을 끼고 펼쳐져 있는 넓은 들판이 농사를 짓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살기 좋은 자연조건을 갖춘 이 지역에는 분명히 규모가 매우 큰 인구가 조직적인 집단을 형성하며 문화를 정립했을 것이 틀림없다.

죽림리 일대에서만 모두 550여 기의 지석묘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학술조사 이전에 파괴된 지석묘들의 수를 고려하면 1,000여 기 이상의 지석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창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북방식이라 불리는 탁자식과 남방식인 바둑판식 등 다양한 지석묘가 한 곳에 모여 있다. 선사시대에 이곳에서 다양한 문화가 만났다는 증거다.

우리 기후상 땅에 묻은 유골이 오래 남아있지는 않지만, 간혹 고인돌에서는 사람의 유골이 발견된다. 지석묘에서 발견된 유골 중 DNA 검사 결과가 서양인으로 나오기도 한다. 우리 땅은 원래부터 다민족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우리나라에는 300톤 이상 나가는 무거운 고인돌도 있다. 그 정도 크기의 고인돌을 세우려면 상당히 많은 노동력과 그 노동력을 부릴 수 있는 정치 조직력은 물론, 풍부한 식량이 필요했을 것인데, 선사시대의 우리 선조들이 이같은 조건들을 이미 다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매우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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