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바다] 무엇이 우리를 잠에서 깨우는가
2020-08-03 (월)
김소형 (SF한문협 회원)
살아가면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가장 그립거나 아름다웠던 순간들, 또는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가장 힘들고 아팠던 시간들이다. 그것은 때로는 하나의 단어만으로도 많은 시간과 공간을 담는다. 그리고 그 하나의 단어가 물받침이 되어 흐르는 기억을 담아낸다. 흐르고 흘러 넘쳐흐를 때면 어느새 부피를 키워 더욱 커지던 시간의 기억들. 그렇게 탱크처럼 오래 수장이 되었던 단어가 어느 날 불쑥 잠에서 깨어나듯 의식 위로 올라온다. 그렇기에 아무리 오래 전 시간의 기억일지라도 바로 어제 일처럼 꺼내져 올라와 현재의 우리를 온통 휘감고 붙들기도 한다.
이른 아침부터 아무런 예고 없이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음. 드릴로 뚫는 소리와 무언가를 움직이고 놓는 행위로 생기는 묵직한 무게감과 진동이 함께 울려온다. 독립된 하우스를 갖는 공간에서는 조금은 멀게 느껴지는 소음일지 모르나, 나무 판들로 연결된 오래된 옛 집들은 서로의 소음도 동일한 울림으로 공유한다. 전기 드릴 소리와 삐걱거리는 소리들로 오랫동안 침묵했던 고요에 울컥 울음을 토해내는 것 같다. 시멘트와 철근으로 이루어진 아파트가 아닌 목재를 사용하여 지은 오래된 옛집들에 서로 엉켜있던 나무들. 누군가가 그들의 한 곳을 아프게 건드리자 그들 모두 함께 침묵의 세월을 깨고 그들의 존재를 부르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시간.
그렇게 이른 아침을 깨우던 울림 덕분에 일찍 시작된 하루. 문득 ‘무엇이 우리를 잠에서 깨우는가’를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결코 이른 아침이 아닐 수 있다. 이미 해가 뜬지 오래이기에 ‘이르다 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기준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정한 시간의 기준일 뿐이다. 그렇게 아침이라는 시간과 하루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의식이 깨어 있다고 생각한 시간들 속에서 조차 어떤 시간들은 실제 인식 너머에 존재하기도 했고, 때로는 각자의 관심사와 중요도에 따라 걸려지고 사라지며 잠을 자고 있는것과 다름없기도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세계인들이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싸우는 동안에도 위험을 크게 인식하지 못한 몇몇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에 더 가치를 부여하며 타인에게 위협이 되는 행동들을 서슴치 않기도 한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코로나 파티를 의도적으로 즐긴다. 그들의 의식은 깨어있는 것인가 잠을 자고 있는 것인가. 자신이 보고 싶은 관점으로만 보며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만 믿는 사람들, 또는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행하는 사람들과 진실을 은폐하며 치부를 숨기는 사람들. 그들은 잠이 든 척 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그저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구석에 고개를 박고 있으면 모든 것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의 의식이 회피와 변명만으로는 결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일들도 있다.
길가에 누군가의 정성으로 장미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뜨거운 여름, 33년 전 그 여름에도 피었을 붉은 장미가 민주화 항쟁의 상징으로 남아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 걸렸다. 한국근대 건축사에 큰 업적을 남겼던 건축가 김수근이 그의 업적과는 달리 독재정권을 위해 고문과 감금, 취조를 위한 이 악명높은 건축을 설계했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가장 처절한 공간에 놓일 수 있는지를 고민하여 만든 것 같은 남영동 치안본부. 물 고문으로 사망한 고 박종철군이 고문을 받던 그곳이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문을 열었다. 경찰청장은 처음으로 과거 국가폭력에 대해 사과했고, 떠난 이의 부모는 병상에 누워 ‘사죄한다’는 한마디를 받았다. 떠난 자녀를 가슴에 묻고 살아온 지난 세월과 한이 그 한마디로 소멸되기 만무하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해서 고맙다고 말하며…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로 퍼져 나갈 때 가장 잘 대처한 국가로 꼽히는 한국이 민주화를 통한 오늘이 있기까지는 지난 과오들을 새로이 하며, 더 이상 과거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는 지도층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 깨어있는 의식들의 울림과 희생 그리고 연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회와 개인 전반이 모두 지난 과거를 꺼내어 과오를 규명하는 것은 소모적이며 결코 미래지향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잘못 심어져 현재의 눈을 가리는 나무는 잘라내 주거나 그 나무로 인해 뿌리를 제대로 내리고 자랄 수 없는 나무라면 옮겨 심어주고 병충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보살핌도 필요할 것이다.
이른 아침을 깨웠던 소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옆 집의 낡았던 나무 문이 하얀색 페인트칠 된 모던한 모습으로 새로이 바뀌어 있다. 밖에서 보여지는 것은 단지 문의 색이 바뀌고 새로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 또한 새로이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 안에 묵었던 가치관과 의식들도 새로이 깨워지는 날엔 외부로 보여지는 모습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도 분명 변화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변화의 한복판에서 홀로 깨어있기 힘들거나 홀로만 있다 느껴질 때면, 우리가 연대한 이들과 서로의 나무판을 맞대듯 울림으로 마주할 때 우리는 서로를 보다 선명하게 깨울 수 있을 거라고 새로이 단장한 그 문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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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SF한문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