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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나선 자들을 위한 변론

2020-06-12 (금) 한영운 시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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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 네크라소프의 시구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청년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에 인용되어 친근한 문구다. 19세기의 고루한 문장이 불현듯 떠오른 이유는 제도적 인종차별에 대한 유색인종 특히 흑인 공동체의 슬픔과 분노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80년대의 한국과 2020년의 미국은 참 슬프게 닮아있다.

2020년 5월25일, 미네소타 주의 미니애폴리스 경찰 데릭 쇼빈 외 3인에 의해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살인사건은 미국사회 전역에 큰 울림을 주었고 그 울림은 미국 내 동포사회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한인 사업장 등의 파손으로 야기된 경제적 피해다. 한인 소상공인들의 피해는 1992년 LA 항쟁의 트라우마를 상기시켜 또 하나의 아픔과 시련의 기억으로 남을까 진심으로 걱정된다.

한인들이 겪은 경제적 피해와 안전의 위협은 절대 묵과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고 친척이며 가족으로서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다만 필자가 걱정하는 바는 미국사 에 오래 기억될 이 소수인종들의 투쟁이 한인사회에는 증오와 혐오의 시간으로만 남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런 피해가 반복해서 일어나는지에 대한 질문에 근본적인 답을 구해야 한다. 그러한 고민 없이 시위의 폭력성과 피해에만 집중한다면 아픔의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80년도 광주에서 시민군은 파출소 무기고에 있는 총기들로 무장을 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들의 손에 쥐어진 총 때문에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80년대 후반 학생 시민운동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던 화염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화염병은 폭력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화염병으로 자신들을 방어했다는 사실이 민주화운동의 당위성을 깎아내릴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그들의 반대편에는 너무나도 두렵고 폭력적인 비상식적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80년도의 광주에서, 또 87년도의 광화문에서 약자들이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최소한의 자구책조차 마련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폭압적인 공권력과 배후에 공포로 군림하는 독재정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노예제도의 반석위에 흑인들을 한낱 ‘재산’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백인 엘리트 계층이 세운 국가이다. 유색인종, 특히 흑인들은 그 엘리트 계층의 번영을 보장하기위해 만들어진 사회구조 안에서 항상 억압받으며 살아왔던 공동체이다. 따라서 이들이 자신들을 강압하는 공권력을 바라보는 시각은 80년대 대한민국의 거리에서 시위하던 시민들이 정부를 바라보던 시각과 비슷할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 사태의 책임은 경찰을 향해, 가게를 향해 돌을 던진 억압의 피해자들이 지게해서는 안 된다. 그 책임은 이 사회에 만연히 행해지는 구조적 탄압에 대한 서러움과 분노를 거리에서 터뜨릴 수밖에 없도록 방관한 백인우월주의 사회가 지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집회의 쟁점은 그것이 평화로운지 아닌지를 넘어 시위의 근본적 이유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에서 비추어봤을 때 시민운동의 정당성은 비폭력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거리로 내몬 불의의 근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동포사회가 폭력성에 집중하여 백인우월주의의 오만과 공권력의 압제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조지 플로이드의 유언처럼 우리도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는 날들이 올 것이다.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 피해 한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분노 또한 함께할 수 있다. 이 사회를 함께 사는 유색인종으로서, 한인들에 대한 공감이 백인 우월주의 종식을 위해 일어나는 시위에 대한 반감으로 진행되질 않기를 희망한다. 이번 사태로 피해 입은 상공인들의 슬픔은 동포사회 전체가 함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적 불의에 대한 노여움 또한 널리 공유되길 바란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이 사회를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영운 시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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