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역사상 고전 음악 분야에서 기다림의 법칙을 가장 잘 활용한 작곡가는 바그너였다. 그의 작품은 한 편당 적게 잡아도 4시간 이상은 훨씬 넘었으니 길다고 좋은 것은 아닐테지만 바그너야말로 지루함의 달인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안 보고, 안 듣고 말지. 교향곡 30분, 오페라 2시간이면 인내력을 최대한 발휘한, 나름 문화생활에 할애할 수 있는 적정선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바그너 작품의 경우 4시간을 넘어 5시간 혹은 6시간까지 걸려가면서 감상에 열을 올리는 매니아들도 많다.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선 정신질환자 아니면 악취미의 소유자들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바그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름 이유있는 변명이 있었다.
과정이 생략된 답안지란 그것이 제 아무리 명답이라 해도 메마를 수밖에 없다. 긴 음악을 인내한다는 것은 음악감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서 그것을 인내할 수 없는 자는 음악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바그너는 말하고 있다.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오랜 세월을 기다리듯 긴 시간의 기다림없이 다가오는 환희란 없으며 또 음악이란 장르 역시 모든 감동의 예술이 그러하듯, 긴 시간의 인내와 고통 없이는 맛 볼 수 없는 긴 시간이 창조해낸 인고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특히 음악예술은 그 감상에서부터 연주에 이르기까지 순간의 점화가 아니라 늘 기다림의 법칙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느린 아다지오 악장을 듣다보면 이런 기다림의 법칙이 주는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는데 빛의 예술이라기 보다는 소리의 예술, 색채의 화려함보다는 어둠이 주는 그런 부정적인 요소에서부터 출발하여 새벽을 예감하는, 묵시적(?)인 예술로서의 음악…어둡고 내밀한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아다지오같은 작품은 길게 늘어지는 지루함때문에 오히려 영혼의 고통을 덜어주고, 음악의 아름다운 신비를 전하는 예술로서 대중적인 사랑까지 독차지 하고 있다. 말러의 작품은 모를지라도 말러의 아다지오(교향곡 5번의 4악장)만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영화 같은 곳에서도 널리 인용되고 있는 작품이며, 말러의 작품에서부터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앨비라 마디간,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나오는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그리고 운명 교향곡, 영웅 교향곡의 2악장에 이르기까지 세상에는 너무도 아름답고 훌륭한 아다지오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얼마전 크로니클 紙가 전하는 팬데믹을 위한 음악을 들어봤더니 지나치게 참혹한 선율만 가득 리스트 되어 있었다. 어둡고 비감하고, 내면적인 작품이여야만 꼭 극복의 모습을 전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느림의 미학,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아다지오야말로 요즘처럼 가슴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듣고 싶은 음악은 아닌지 모르겠다.
추천하고 싶은 작품 중, 부르크너의 아다지오는 교향곡 7번의 2악장도 멋있지만 교향곡 8번 3악장의 아다지오는 요즘처럼 팬데믹으로 상처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이상적인 작품으로서, 단점은 다소 길다는 것이지만(30분) 또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아이러니가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긴 음악들이 수없이 존재하지만 음악회에서 내가 들어본 가장 긴 아다지오는 부르크너의 교향곡 8번의 3악장 아다지오였다. 물론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조금 황당한 느낌을 받았다. 절반도 못가 나의 집중력은 다른 곳에 한 눈 팔고 있었고 이 곡이 끝났을 때 나는 마치 길고 지루한 어느 장례식장을 빠져나온 느낌을 받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나 온 느낌이었다고 할까. 남는 것이라곤 그저 어둡고 절망스러운 느낌뿐, 평범한 일상의 반복같은 무료한 선율의 연속일 뿐이었다. 어느날 피곤해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자동차의 오디오 테입에서 이 곡이 흘러 나왔다. 아마 4악장을 듣기 위해 틀었던 것이 반대쪽 3악장이 흘러나왔던 것 같았다. 한숨 자고 싶었기 때문에 굳이 음악을 반대로 돌리지 않고 그대로 놔 두었는데 하나의 음악을 들으며 그때처럼 많이 울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심신이 피로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때 부르크너의 작품은 이 세상의 음악이 아니었다. 오직 생사의 경계에서, 감각은 죽고 인식으로만 깨어있는 사람에게만 들려오는 영혼의 나팔 소리 같았다고나할까. 하나의 소리가 이처럼 세속화되지 않고 절대 음악으로서 그 위엄과 순수를 지낸채 장엄한 메아리로 울려퍼질 수 있을까. 감동은 오랜 기다림의 끝이며 황혼으로 돌아오는 장엄함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긴 아다지오…그것은 어쩌면 형극의 길이고 고통의 찰나였지만 또 죽어가는 모든 것에 대한 기다림과 그 해답을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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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