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창] 친 구
2020-05-21 (목) 12:00:00
이현주 (주부)
새내기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하나 있다. 나처럼 수능 점수에 맞춰 들어온 것이 아닌, 문학 특기자 전형으로 국어국문과에 입학한 인재였다. 소설을 써서 대학에 들어올 수도 있다는 걸, 그 친구를 만나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애는 첫 수업부터 쨍한 보라색 미니 원피스에 아찔한 하이힐을 장착하고 등장했다. 우연히 옆자리에 나란히 앉게 되지 않았더라면, 나 같은 풋내기와는 영영 상대해주지도 않았으리라.
그녀에게는 옷차림만큼 강렬한 개성이 있었고, 어린 나이에 재능을 인정 받은 사람 특유의 자신감이 있었다. 내가 갓 태어난 참새처럼 세상 물정 몰랐다면, 그녀는 일찍 일어나 멀리 나는 갈매기였다. 고작 스무 살에 전업 작가가 되겠다고 당차게 선언할 정도였다. 단언컨대, 그 애의 스무 살은 다른 이들의 스무 살보다 훨씬 멋진 것이었다. 그후의 나날들도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학부 시절 내내 우리를 괴롭힌 취업난과 불황 속에서, 전업 작가가 되겠다는 포부는 꿈 아닌 망상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글쓰기에 집중하겠다며 학부 내내 교직 이수에 사활을 걸었다. 그러나 졸업 후, 초임 선생님에게만 궂은 일을 도맡아 시키는 시골 학교에 발령을 받아 응급실에 실려갈 정도로 격무에 시달렸다. 그 외롭고 힘든 타향 살이에 위로가 되어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둘 사이에 금방 아이가 생겼지만, 남자는 자신의 아들이 워킹맘 밑에 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님이 맞벌이 부부였던 탓에 본인의 유년기가 외로웠다는 이유였다. 친구는 저항했지만, 싸움이 점점 커져 결혼 생활을 위협할 지경이 되자 가정을 선택했다. 수입이 절반이 된 살림은 빠듯하고, 남편은 육아나 가사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 이제 일곱 살 된 아들은 유난히 잠이 없고, 그녀에게는 자기 책상조차 없다. 잘 지내느냐 묻는 내 말에, 살만하다 한다. 글은 쓰고 있느냐 묻자, 농담인 줄 안다.
이제 우리는 인생이 반짝이는 것들에 대한 애도로 이루어져 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친구가 소중한 것을 삶의 어느 모퉁이에 내려놓고 왔다 해도,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을 이해한다. 불혹에 미치지도 못한 이 날까지, 우리는 얼마나 빨리 남루해졌는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사는 게 그렇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주 (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