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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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와 베이글

2020-04-26 (일) 변호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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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일룡 칼럼

나는 고등학교 때인 1974년에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까지 피자와 베이글을 몰랐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고사하고 이름조차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피자는 대학에 가기 전 식품점에서 냉동피자를 사 와 집 오븐에 구워 먹어 본 것 외에 식당에 가서 주문해 먹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베이글은 대학 입학 전에 먹어 본 적 조차 없었다.

그런데 피자를 대학에 들어가서는 종종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밤에 기숙사 방에서 공부하다 출출한 배를 채워야겠다는 핑계로 공부를 잠시라도 쉬고 싶을 때가 피자를 먹는 기회였다. 기숙사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 오면 보통 7시 전이었다. 그 때 부터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다가 10시 정도 되면 더 이상 하기가 싫어지곤 했다. 정신 집중도 잘 안 되어 중단하고 싶으나 그대로 그만 두거나 잠자리에 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고, 사실 해야 할 과제들은 항상 쌓여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때 배가 고픈 게 좋은 핑계가 되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 시간만 되면 나를 도와 주려는지 배고픔이 찾아 왔다.

그 때 기숙사 가까이에 나와 가까운 친구가 함께 즐겨 가던 피자 가게가 있었다. 우리가 방문하는 시간에 그 가게는 항상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때로는 테이블이 나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 바로 앉아 주문할 수 있었다. 우리가 보통 먹던 피자는 기름이 잘잘 흐르는 페퍼로니 피자였다. 어쩌면 몸에 가장 안 좋은 토핑이었지만 입에 가장 당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 항상 고민하면서도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 주문하는 피자 사이즈였다.


공부하다 출출하다고 나왔으니 조금만 먹고 돌아가 다시 공부할 수 있도록 한 쪽 씩만 먹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미디엄 사이즈 한 판은 먹어야 한다고 뜻을 모으는 것을 넘어, 기왕 먹는 김에 2불만 더 주면 두 배 정도 되는 크기의 라지 사이즈를 먹을 수 있으니 그게 더 경제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라지 한 판을 시켜 단 한 쪽도 남기지 않고 둘 이 모두 다 먹어버리곤 했다. 그러고 나면 죄책감이 찾아 들었지만 나 혼자 그런 게 아니고 친구와 같이 했다는 게 나름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많이 먹었으니 배가 불러 앉아 있기도 거북해 바로 다시 공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소화를 시켜야 한다며 기숙사 1층에 있는 스낵 코너에 들러 푸즈볼 게임을 한판 하고 가자고 한다. 푸즈볼은 일대일로도 할 수 있는 게임이지만 두 명씩 편 먹고 할 수 있기에 나와 친구가 한 편이 되어 다른 팀들과 하곤 했다. 그리고 이긴 팀은 또 계속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팀과 할 수 있고 지면 기다렸다가 차례가 오면 다시 할 수 있는 이 게임에 제법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면 먹은 피자가 배에서 다 꺼지는 것은 물론 오히려 스낵 코너에서 파는 베이글을 한 쪽 씩 주문하기까지 했다. 베이글은 대학에 들어가서야 처음 본 음식이지만 한 밤 중에 토스터로 구워 발라 주는 크림치즈와 같이 먹으면 맛이 기가 막혔다. 크림 치즈를 조금이라도 더 발라 달라고 갖은 애교를 떨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베이글까지 먹고 또 소화 시키면서 푸즈볼 게임을 하다 보면 어느덧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도 훨씬 넘겨 기숙사 방에 돌아 가게 된다. 그러니 다시 책을 들여다 보는 것은 무리인 것이 되어 버리곤 했다. 다음 날 아침, 아니 이제 불과 몇 시간 후면 다시 일어나 씻고 아침 식사 후 수업에 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기를 자주 반복 했던 대학 시절이었다. 공부의 스트레스와 그를 이겨 내는 비합리적, 비건강적(?) 대처가 주거니 받거니 하던 때였다. 현재 나의 풍만한 배는 모두 그 때 축적해 놓은 지방층이라고 여겨도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때 그렇게 즐겨 가던 피자 가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인지 몰라도 문을 닫았다고 한다. 아쉽다. 피자 맛도 그렇지만 추억의 맛이 나에게는 그 이상 더 좋은 곳이 없는 장소 중 하나인데 말이다.

<변호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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