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짧은 생각들

2020-04-22 (수) 01:32:06 전윤재(오클랜드도서관 한국어섹션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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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따뜻한 햇살에 스르륵 눈이 감기는 봄.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나서야만 오는 것인데. 자꾸만 잊는다. 겨울없이 오는 봄은 없는 법이건만. 겨울이 겨울다운 혹독함과 황량함으로 버티어낸 시간이 있었기에 봄이 왔다는 것을. 아름다운 봄은 겨울의 노고의 가장 큰 수혜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2. 어찌어찌 글쓴이의 손끝을 떠나 세상에 태어난 글들은 수도 없이 많을텐데. 그중 글쓴이의 품을 떠나는 글은 얼마나 될까. 글자들을 모아다가 땅 위에 흩어 뿌리면 더러는 고운 모래처럼, 더러는 뽀죡한 유리조각처럼 이 세상을 덮고도 남겠지. 그중 어떤 글은 누군가의 마음을 타고 흘러 그를 위로하고 또 어떤 글은 누군가의 마음을 후벼파고 들어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겠지. 태어났지만 누구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야마는 글자들의 운명은 어쩐지 서럽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라질지언정 적어도 뿌려져 보길. 그러다 운이 좋으면 뿌려진 길 위에서 그저 누군가에게 닿아 그대로 전달되길…

3. 한겹 두겹 시간과 함께 내려앉은 그리움은 자꾸만 두터워진다. 처음에는 살짝 힘주어 들어올리면 휙 하고 날아가버리던 그리움들은 이젠 온몸에 힘을 실어 움직여 보려 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무거운 그리움이 서러울 때, 서늘해지는 바람에 한숨을 실어 보낸다.


4.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그렇지 않다.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서 뭔가 달라진 것 같아 보이겠지만 그것을 두고 시간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 내가 당면한 문제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을 미친듯이 살아낸 나 때문에 해결된 것이다. 그러니 공은 나에게 돌려야 맞다. 시간이 한 일이 아니다. 수고한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 장하다. 수고했다.

5.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어쩌면 처음부터 비어있었던 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백(餘白)이 아니라 공백(空白)이었달까. 누군가가 자기를 억지로 채워넣으려고 달려들었을 때 공백은 경악했을런지도 모른다.

6. 무언가를 쌓아가는 행위는 시간이 필요하고 어떤 형태로 쌓겠다는 의도가 필요하고 실행이라는 결단이 필요하다. 노력과 시간의 투자 없이 되는 일이 아니다. 신뢰를 쌓다. Build trust. 문화가 다른 곳에서 같은 말을 들을 때면 그저 언어가 다를 뿐이구나 하는 마음속 출렁임이 느껴진다.

<전윤재(오클랜드도서관 한국어섹션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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