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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들의 그로서리 샤핑

2020-04-15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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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유권자들의 선택을 기본 틀로 해서 움직이고 작동한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권력의 추가 이동하고 그에 의해 정치와 국가의 정책과 방향이 결정된다. 권력을 위임할 사람들을 고르는 선거에서 후보들은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수사를 동원하고 장밋빛 약속들을 쏟아낸다. 너무 많은 주장들이 어지럽게 난무하다 보니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또 누가 진실하고 누가 위선적인지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어쨌든 유권자들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선거에서 승리한 세력은 ‘국민들의 위대한 선택’이라며 화려한 수식어로 선거결과를 치켜세운다. 하지만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다. ‘진정한 선거혁명’으로 평가할만한 위대한 선택들도 간혹 있었지만 ‘자기 파괴적’ 결정이었던 것으로 판명된 선택들 또한 적지 않다.

리처드 솅크먼은 유권자들의 선택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지닌 역사학자이다. 그는 ‘지혜로운 유권자들’이라는 믿음은 신화일 뿐이고,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 것이 유권자들의 진짜 모습이며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을 심어준 결정적 계기는 9.11 테러였다. 테러 발생 이후 정부의 거짓에 속아 넘어가 잘못된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이 바로 유권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유권자들의 선택은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거의 어김없이 배신에 직면한다는 점에서 솅크먼의 주장을 크게 틀렸다고 보긴 어렵다. 결과적으로는 어리석은 투표를 한 셈이 되니 말이다.

정치에서는 이성보다 감정의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한다. 뇌 연구를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우리는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정치적 결정을 내린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는다.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기 위해 어떤 사실이나 숫자, 정책 등을 꼼꼼히 따져보는 경우란 거의 없다. 감정적 반응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선거에서 진보가 보수를 상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이유는 ‘합리적인 유권자’라는 희망 섞인 믿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는 정치가 이성이 아닌 감정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이를 선거 전략에 적절히 활용해왔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자 한국의 보수 정치인들은 공포와 혐오를 조장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또 보수 언론들도 불안을 부채질하는 보도를 쏟아냈다. 거짓과 왜곡이라는 비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감정을 관장하는 복내측전전두피질(VMPFC)을 자극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카네기 멜론대 대니얼 오펜하임 교수는 투표를 그로서리 샤핑에 비유한다. 머리로는 어떤 음식이 몸에 좋은지 잘 알고 있지만 막상 카트에 담는 식품은 입맛을 강하게 당기는 초콜릿 칩 쿠키 같은 정크식품들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성적 판단이 감정적 유혹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오펜하임 교수의 비유는 “유권자인 당신의 샤핑 카트에 어떤 후보를 골라 담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현명한 유권자가 되고 싶다면 식품의 성분분석표를 살피듯 후보들의 정책은 무엇이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왔는지, 평판은 어떤지 등을 따져보는 정도의 수고와 노력은 해야 한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의 힘을 발휘해 합리적 판단을 하는 유권자들이 조금만 더 늘어나도 정치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달라진 정치는 달라진 국민들의 삶으로 연결된다.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속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의 속성이다. 그러니 마냥 정치인들만 욕할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고 카트에 건강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을 골라 담아야 할 책임이 유권자들에게 있다. 이 칼럼이 나갈 때 쯤 한국의 총선 결과가 나와 있을 것이다. 유권자들은 과연 카트에 누구를 골라 담았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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