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빨리빨리’ 유전자

2020-04-02 (목)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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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작가인 사이먼 윈체스터는 1980년대에 한국을 방문, 울산의 조선소를 둘러본 후 충격을 받았다. 조선소 곳곳에서 수많은 배들이 동시에 빠른 속도로 건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 받은 깊은 인상을 자신의 책 ‘한국: 기적의 땅을 걷다’(Korea: A Walk Through the Land of Miracles)에 상세히 기술했다. 웨체스터는 “2차 대전 후 영국 조선소들은 기껏해야 4~5척의 배를 동시에 만들 수 있었을 뿐인데 울산의 조선소는 동시에 46척의 배를 만들 수 있다”며 “그것도 유럽 조선소들의 절반 시간에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말이다”라고 썼다.

웨체스터가 받은 이런 인상은 한국을 방문하거나 한국에서 살아본 외국인들 대부분이 한국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이다. 이른바 ‘빨리빨리’ 문화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 한국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아드보카트는 “‘빨리빨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빨리빨리’는 옥스포드 사전에 ‘ppalli ppalli’라는 단어로 등재됐을 정도다.

외국인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는 한국의 ‘빨리빨리’ 10 장면에는 우리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판기 커피가 다 나오기도 전에 컵을 뺀다든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있는데 닫힘 버튼을 누르는 것, 채 익지 않은 고기 자꾸 뒤집기, 복사기가 출력 중인데 종이 잡아당기기 등 한국인의 급한 성질을 보여주는 장면과 일화는 끝이 없다.


개인들로 보면 서두르고 조급해하는 사람에서부터 만사 느긋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의 성격들을 갖고 있겠지만 한국이란 나라 전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사회적 성격은 한마디로 ‘빨리빨리’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성격을 바탕으로 폐허 속에서 단기간 내에 경제를 일으킬 수 있었으며 IT 강국이 됐다. 불편한 것은 참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편리하게”를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배달문화와 간편식 등 한국 특유의 소비현상까지 만들어냈다.

조속한 성과를 추구하는 ‘빨리빨리’ 문화의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지적들이 있음에도 빠른 적응과 속도가 생존에 필수적인 조건이 되고 있는 경쟁사회에서 그 폐해만을 강조할 순 없다. ‘빨리빨리’라는 말에는 이중적 의미가 담겨있다. 그 하나는 조급증이고 다른 하나는 민첩성이다. 조급증은 부실과 실수의 원인이 되지만 민첩성은 발 빠른 대응을 가능케 하는 긍정적 자질이다.

코로나19와 관련해 외신들이 한국의 신속한 검사와 추적을 호평하면서 한국이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을 검사하고 광범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이유로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유전자’를 꼽은 것은 바로 이런 민첩성을 높이 평가한 것이라 생각된다. 한국은 시험을 설계해 테스트를 만들고 전국에 실험실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모든 작업을 17일 안에 끝냈다. 한 외국 전문가는 “빠른 진단과 치료를 통해 한국은 시간을 사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빨리빨리’ 유전자이다.

평소의 매뉴얼로 대응해서는 비상상황을 극복하기는 힘들다. 많은 국가들이 저지른 실수다. 한국은 신속한 대응으로 이들 국가들에 모범적 방역사례가 되고 있다. 조급해하지 않으면서 민첩하고, 부산스럽지 않으면서 바지런한 ‘빨리빨리’라면 그것은 자랑할 만한 유전자라 할 수 있다.

짧은 이민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주 한인사회가 급성장 할 수 있었던것 역시 ‘빨리빨리’ 유전자가 발현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이런 유전자는 코로나19로 무너진 우리의 일상을 회복하고 무너진 삶의 현장을 복원하는데도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라 믿는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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