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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길 위에서

2020-03-12 (목) 전윤재(오클랜드 도서관 한국어섹션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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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한 명이 길을 걷다 갈림길에 섰다. 한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에서 만난 갈림길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나그네는 자신의 발 아래 여기저기로 뻗어 있는 길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어떤 길로 가야 하는 걸까. 이 길로 가면 되는 걸까. 저 길로 가야 하는 걸까. 시간을 쏟고 마음을 내어 고민해 봤지만 선택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같은 자리에 서서 나그네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길들을 바라봤다.

기왕이면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길로 가야 편한 길을 걸을 수 있는 건지 알고 싶어졌다. 나그네는 힘을 잔뜩 주어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눈길이 닿는 곳 끝까지 구석구석 그의 앞에 놓인 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길을 선택하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길을 걷는 동안 옆에 있는 다른 길들을 동시에 걷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는 몸이 하나밖에 없는 인간이다.

이 길이 최선이라고 믿고 걷기 시작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풍경이 펼쳐지지 않자 나그네의 마음은 후회와 아쉬움으로 흔들린다. 이 길이 아닌 것 같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이제라도 갈림길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다행히 그는 자신의 한계를 떠올린다. 그래. 나는 몸이 하나뿐인 인간이 아니던가. 이곳을 걸으면서 저곳을 동시에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어떤 선택이든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 길이 아닌 저 길을 걸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것이 선택의 숙명이다.

계속해서 걸으며 나그네는 생각한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어떤 길을 걸을까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떤 태도로 그 길을 걸을 것인지, 어떤 마음으로 선택한 길에서 마주하는 것들을 겪어나갈 것인지, 길 위에 있는 자잘하고 사소한 것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 맺고 걸어나갈 것인지 하는 것들이 어떤 길을 걸을까 하는 선택에 앞서 고민해 봐야 하는 것들일 수 있다. 앞으로도 무수한 갈림길이 내 앞에 펼쳐질텐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그네는 겁이 났다. 그래도 결국 이 길의 끝은 계속 걸을 때만 닿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그네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마음에 다시 한번 새기고 용기를 내어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향해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전윤재(오클랜드 도서관 한국어섹션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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