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창] 어느 노부부의 일상
2020-03-07 (토) 12:00:00
정보경(연방정부 컨트렉터)
우연히 창가에 비친 노부부가 내 시선에 들어왔다. 80세 중반쯤의 할머니는 자유로운 거동으로 테니스 공들을 보도블럭에 던지거나 발로 찬다. 90세 정도의 할아버지는 허리가 반쯤 굽어 움직임이 느리나 바퀴가 달린 워커를 밀면서 공을 주우러 간다. 아침 저녁 공놀이를 삼아 산책하는 노부부에게 관심이 쏠린 것은 내 부모님 때문일 것이다.
젊디 젊은 나이에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날 큰딸 생일을 아파서 챙겨주지 못한 애틋한 아버지의 모습이 나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중후한 남자 어르신들을 뵈면 내 아버지도 살아계셨더라면 저렇게 멋지게 늙어가셨을 거라 생각했다. 강건했던 친정엄마는 2018년 어느 봄날 2층에서 추락하여 척추 수술을 받았다. 몇 년 전 2주간 한국에 갔지만 친구들과 여행 일정이 잡힌 엄마를 못만나고 올 정도로 활동적이셨다. 사고 소식을 접하고 출국해서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엄마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늙어버린 백발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하루 아침에 사고로 장애자가 된 엄마는 전문 의료진의 관리감독이 필요한 요양병원에 계신다. 작년에 엄마를 뵈러 갔는데 수술 후 허리가 반쯤 접혀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수술 후 통증이 심하니 몸도 쇠약해지고 삶에 대한 희망도 없으셨다. 우울한 엄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추억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엄마! 언제가 제일 행복했어요?”라고 물으니 5형제 키울 때가 제일 행복하셨다며 그 옛날 시절로 돌아가 잠시나마 통증을 잊으셨다. 모처럼 엄마와의 시간여행은 현재의 암울한 상황을 극복하는데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동안 엄마가 식사를 거의 못하셨는데 식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척추 수술 후 평범한 일상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엄마를 생각하면 집 앞에서 마주치는 노부부의 일상이 비범해 보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놀이를 운동삼아 하면서 마트 가서 일상용품을 구입한 뒤 집으로 가는 듯 보인다. 스스로 잘 살아내셨던 엄마는 이제 의료진의 도움을 받는 삶으로 바뀌셨다. “큰 일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사소한 일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야말로 몰락의 시작이다”란 헤르만 헤세의 말을 곱씹으며 사소한 하루를 얼마나 당연시했는가 반성한다. 날마다 주어지는 보통의 일상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 그 사소함을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는다.
<정보경(연방정부 컨트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