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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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이별 앞에 서다

2020-03-05 (목) 전윤재(오클랜드 도서관 한국어섹션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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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까지’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아마도 연인들이 헤어지는 장면이 먼저 떠오를 테지만, 조금 물러서서 생각을 넓혀 보면 이 말은 사람들이 맺고 있는 수많은 종류의 인연이 끝을 향해 나아갈 때 이별을 준비하며 생각하게 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이별이 힘들어 스스로에게 하는 독한 다짐일 수도 있고, 이별이 괴로워 상대에게 뱉는 서운함의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별은 애시당초 그리 깔끔하게 경험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보니 우리는 여기까지라는 말로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해도 마음은 여전히 헛헛하고 시리며 단정하게 정리되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은 서로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 못내 아쉽고 서러워 내뱉는 선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의미를 두며 붙잡고 살아가는 것들은 헤아려 보면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던가.


살다가 어떤 시점에 이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써오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고 마침내는 장(章)을 바꿔 그 다음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할 때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까지’라는 말은 우리는 지금부터라는 새로운 장(章)을 써내려가기 위한 마침표일지도 모르겠다. 이별은 마침표 뒤의 이야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 의미를 드러낸다. 그 다음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는 아픔 속에 멈춰 있지 않고, 아픔을 품고 계속해서 나아갈 때만 알 수 있다.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가득찬 이별로 맺어지는 이야기는 완성을 기다리는 미완의 이야기다. 생각할 때마다 쓰리고 아프고 두렵고 무거운 감정들로 가득 찬 이별 이야기의 결론은 ‘우리는 여기까지’ 후에 이어질 ‘우리는 지금부터’에서 완성된다.

이별은 힘들다. 그래도 이별을 겪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온전히 아파하며 이별을 잘 겪어 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난 후 마침표 뒤의 아직 시작되지 않은 이야기를 잘 써내려갈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내 삶에서 아직 시작되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며 일단 이야기가 펼쳐지면 그 이야기는 오직 나만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별로 우리 이야기의 한 장(章)이 마무리될지라도 이별의 의미는 이제 막 쓰기 시작한 새로운 장(章)에서 내가 이야기를 써내려가길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윤재(오클랜드 도서관 한국어섹션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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