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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남아있는 나날

2020-02-28 (금) 부영무 (치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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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어느덧 제법 돌아 볼 세월을 가진 나이가 되어버렸다. 지나 온 삶의 시간들이 길게 느껴지지 않지만 남은 날들 또한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이란 상대적이라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 추억의 장들이 갑자기 펼쳐지면 뒤이어 연상을 낳고 곧바로 후회와 연민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인생이 고뇌 란 말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고통과 후회 속에서도 건져낼 행복과 미소의 꽃들이 많이 있다면 어느 정도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재작년인가, 문필가인 S여사님에게서 선물 받은 ‘남아 있는 나날’이라는 소설책이 생각난다. 그 해의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 라는 일본계 영국인의 수상작이다. 책의 구성이 흥미롭다. 챕터 별로 시간과 장면이 바뀌면서 주인공의 시선에 따라 경치가 들어오고 사람이 나타난다. 우리는 같이 시간여행을 떠나게 되고 같이 회상을 하게 된다. 대상의 단순하면서도 섬세한 묘사는 어린애같은 동심의 눈이요, 직접적이지 않게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표출되는 나오는 사람들의 성격묘사는 성숙한 작가의 눈이라 할 수 있겠다.


주인공은 직업의식이 투철한 영국의 귀족집안의 집사로 나온다. 아버지대에서부터 물려받은 천직이요 자부심이다. 주인에겐 믿을만한 충성스런 사람이고 본인은 책무를 다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희생하고 참을 줄 아는 진정한 프로이기를 원한다.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온 주인공에게 은퇴의 시기가 다가오면서 과거를 돌아보며 남아 있는 그 무엇을 정리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 이야기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도 그런 여행을 준비해야 하는지 모른다. 평생을 열심히 살았어도, 그 최선이라는 마차에서 한번도 내려오지 않았어도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느 날 여행을 떠나야 할 지 모른다. 자다 깨면 떠오르는 수많은 과거의 실수와 오류들,회한으로 남는 미련들, 마음에 끈질기게 남아 없어지지 않는 상처의 파편들이 모두를 모아 없어질 무의식의 창고에 넣어 두어도 문득 문득 자신을 붙잡고 어서 가자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아마 그것은 내가 이승에 있을 때 꼭 해결해야 하는 그 무엇이 됨이 아닐까?

살면서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 여러가지가 있다. 주어진 것이든 선택하는 것이든, 살다 보면 많은 것들이 옆을 스쳐 지나간다. 어떤 것은 내 안에 들어와 깊이 인사를 하고 가고 어떤 것은 내 안에 둥지를 틀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꽃마차는 참으로 인연이 피워내는 꽃으로 가득하다. 때론 악연도 있겠으나 그 악연인들 인연 아니랴? 악연의 아픔을 어떻게든 참고 이겨내면 선하게 변형되는 기적도 가끔 눈 앞에 펼쳐지기도 하고, 어차피 인생은 여러가지의 순열조합인데 하며 확률로 마음을 정리해 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생명은 각자의 가치를 가지고 기를 쓰고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자기의 직업과 삶에 충실했어도 돌아보면 후회스런 선택과 마치지 못한 많은 일들이 잠시의 망각에 묻혀 있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작은 창문을 마음에 가지고 있다. 그 창을 통해 주어진 바깥의 세상을 바라본다. 창밖에는 그 시대의 상황과 풍경이 지나가게 될 것이다. 삼라만상이 내 눈을 통해 펼쳐진다. 그것들을 바라봄으로 해서 나의 인생 배경이 형성된다. 비쳐진 모습들의 잔상을 안고 눈을 감으면 그것들을 바라보는 내가 보인다. 이렇게 같은 창을 통해 안의 세계를 또 접하게 되는 것이다.

떼어 놓을 수 없는 내 밖의 모습과 버릴 수 없는 내 안의 모습이 겹쳐져 인생이라는 나만의 흔적이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하고 끊임없이 몸부림 친다. 덧없이 지나간 세월 속의 흔적들 속에서 지나온 생의 의미를 찾는 한편 남은 나날의 영원으로의 길이 가끔 두렵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 불안한 정거장의 잠시 휴식시간은 나를 돌아보고 내 흔적들을 반추하며 털어내고 정리해 갈 수 있는 훌륭한 시공간이 될 것이다.

누구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고 누구는 꼭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며, 또 누구는 아직 못해서 해놓고 가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지난 날 아쉬운 인연으로 뇌리에 남아 있는 한 여인을 찾아가게 된다. 여행의 목적으로 삼은 이 여인에 대한 방문은 사실 자기 내부에 남아 숨쉬고 있는 연민에 대한 바라 봄이요 그것에 대한 최대한의 성의였을 것이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정리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 대단한 일이다. 새로운 도정에 앞선 결연한 의지의 표출일 수도 있겠고 과거 인연에 대한 존중일 수도 있겠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과거의 가능성에서 벗어나 현재를 직시하게 되어 미래의 시간을 추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피 끓는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것이고 할 수 있는 것을 해 나가야 한다.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을 내 보내도 아직 나에게는 또 남아 있는 날들이 있다. 엄연한 현실이 있고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지만 노력할 수 있고 다가올 저녁에 대한 기대가 있다. 주인공을 통한 작가의 말이 겹쳐진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나, 남은 것이 공허한 것은 아닐거라는…’

남아 있는 나날은 한마디로 우리 모두에게 드리는 연가이다. 제목 자체가 주는 무게로 인하여 긴장감과 위축감을 느낄 수 밖에 없으나, 그 속에서 우리는 지난 날 젊은 날의 추억과 초상을 기억해 내고 남은 날의 불꽃을 찾아야 할 것이다.

<부영무 (치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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