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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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바다] 공상 화요일을 폐지하며

2020-02-24 (월) 신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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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의 삶은 생각보다 별 재미가 없다. 나의 이런 반응에 어른들은 일이 적성에 잘 안 맞냐고 물어보시고 친구들은 연애가 시원찮냐고 낄낄댄다. 제대로 된 적성 판단은 진득하니 몇 년은 일해봐야 알 것이고 딱히 대단한 불만을 품고 일하고 있지도 않다. 연애에서의 적당한 온도 변화는 아주 건강한 현상일 것이다. 그렇게 아주 바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의 문제는 그냥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회사 사람들이랑 번갈아 가며 연애 상담이나 해주며 보내는 점심시간이 없는 게 한몫할 수도 있겠다. 아빠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국 애들은 매번 웃고 있지만 겁나게 까칠하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혹여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올까 봐 머리 굴리고 몸 사리는 게 눈에 보인다. 아니, 어쩌면 미국의 직장 문화까지 함부로 단정 지을 필요도 없을는지 모르겠다. 그저 상큼한 막내 인턴으로 회사 내 밥이나 축내고 다닐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져 더 이상 연애 상담은 적절한 수다 주제가 아닐 수도 있다.

애초에 수다나 말장난이 적절하지 않을는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그만큼 바쁘게 일을 하거나 말 걸지 말아 달라고 컴퓨터 스크린만 응시하고 있으니까.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그런가? 도저히 적절한 타이밍에 말장난으로 시비거는 스킬을 아직 터득하지 못했다. 앙칼진 춤사위가 곁들여진 뜬금없는 아재 개그에 경악하는 주변 이들 표정보는 낙에 사는 나인데!


사소한 재미 없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 게 된 나에게 공상 화요일을 선물하기로 했다. 이름처럼 거창한 선물은 아니지만 거창한 포부를 열심히 늘어놓으며 친구들과 무료한 일주일을 존버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남편 카드나 해맑게 긁으면서 너네들이랑 수다 떨다가 가끔씩 어디 먼 나라 혼자 가서 다큐리멘터리나 찍어야지!”라고 말하면 누구는 “나는 예능도 잘 하는 여배우가 되가지고 돈 진짜 많이 벌고 유명해져야지. 그러면 우리 지민 (방탄소년단)이도 볼 수 있겠지?”라고 묻는다. 그러면 “아니! 보는 것뿐이겠어! 악수도 하고 오빠~ 하면 뒤돌아서 윙크도 해줄거야.”하고 너스레를 떨어주며 귀요미 이모티콘을 날려주는 것이다. 곧 전역하는 모두의 최애 아이돌 윤두준씨와 지금의 안정적인 오빠야와의 결혼에 쓸데없이 깊게 고민하기도 한다. 실현 가능하지 않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논하면서 약간의 실현 가능성에 재미를 찾는 것이 포인트다.

몇 주간 공상 화요일을 여러 친구들과 실천해오면서 다양한 반응을 지켜봤다. 누구 한 명도 “무슨 헛소리야” 하지 않고 가슴 한쪽 품고 살던 동경의 삶을 주저리 늘어놓기 좋아했다. 여배우부터 일 안 해도 돈 많은 다큐멘터리 감독, 우버 시스템을 엿 먹여버릴 만한 대단한 재벌 개발자까지…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문제가 있는 공상가들은 아니다. 현실과 타협하기도 하고 열정페이 받으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아등바등 열심히 사는 사회 초년생들일 뿐.

공상 화요일에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면 수치화할 수 있는 목표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의 노력은 동경하는 미래의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어쩌면 동경한다고 말하지만, 뒤에서는 무시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짜릿한 재미가 나오는 걸 수도 있다. 저 어디 누군가가 살고 있겠다고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삶, 더 엄밀히 말하면 그 환경과 자리를 부러워하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메우려는 노력은 딱히 하지 않는 것. 열등감과 오만함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학 오면 다 행복할 줄 알았어요”

치열한 한국 입시에 많은 피해자가 줄곧 하는 말. 나는 취업만 제대로 하면, 특정 직책만 꿰차면 행복할 줄 알았다. 힘들게 면접 몇 번 봤다고 해서 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아닌데 막연한 동경의 자리가 피부에 닿는 행복이 된다고 스스로 강요해왔다.

아직 많이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대학생이라는 환경을 위해, 취업에 성공한 멋진 커리어우먼이라는 타이틀을 위해 스스로 멋있게 느껴지는 동경의 자리를 쫓아 열심히 살아왔다. 특정 날까지 정해가면서 동경의 자리를 만든다. 막연한 동경을 쫓으며 부풀린 행복을 꿈꿔보고 약간의 자기 연민에 빠져보는 쪽이 항상 편했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어떤 대단한 행복도 아니고 사소한 재미다. 해고 당하는 한이 있어도 미국식 아재 개그를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꼭 회사 사람들의 당황한 얼굴을 보면서 실현 가능한 뿌듯함을 느끼겠다. 실현 불가능한 공상은 “내일은 새벽 5시에 일어날 거야!”로 족하다. 그래서 공상 화요일은 이번 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뭐, 재미 지향 수다를 위한 수단 정도로 사용해볼 수는 있겠지만.

<신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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