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면 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명량해전에 앞서 올린 이순신 장군의 장계이다. 후반기 인생 설계에 대한 고민이 한창이던 작년 여름… 인생 선배들의 삶을 통해 지혜를 얻고자 발품을 팔며 박물관을 돌아다니던 중, 오래 전 스승을 만나듯 광화문 지하 박물관에서 충무공과 해후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모든 교육의 집결점이었던 ‘충효 사상’…… 나에게 이순신은 ‘충’을 담당한 스승이었다. 무과시험에서 낙마했으나 부상을 동여매고 시험을 완수한 이야기로부터, 백의 종군, 연전 연승을 거쳐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강력한 울림을 주었고 성별의 장벽을 뚫고 어린 나의 영웅이 되었다.
민주 정치의 정착을 위해 한국 사회 전체가 몸살을 앓던 시절을 지나며 ‘충’의 개념에 대한 혼란과 평가절하가 생긴 탓이었을까? 아님 그보다 더 열정적인 일을 만난 때문일까? 사춘기 이후 나의 관심은 ‘우리 나라’에서 ‘열방’으로, 나의 영웅은 ‘애국자’에서 ‘인류 구원자’로 옮겨졌다. 그리고 선택한 땅, 아프리카… 20여년의 세월 동안 애국을 넘어 인류애에 마음을 싣고 열정을 불태웠다. 아프리카는 국가라는 정치적 집단성보다 인종이나 부족의 문화적 유사성에 대한 응집력이 더 강하다. 땅은 광활하고 교통수단은 미흡하여 대륙 내 왕래와 소통이 원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로 간주되는 것은 이런 정서를 대변한다.
큰아이는 3살 때 아프리카에 가서 거기서 자랐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해병대를 지원했는데 면접 중 국가관 질문에서 탈락했다. “미국, 중국, 일본, 북한 중 우리나라의 주적이 누구냐?”는 질문에 어릴 때 자주 들었던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이 생각나서 ‘일본’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외모는 한국인, 정서는 아프리카, 언어는 영어를 사용하며 국제화된 이 아이에게는 모든 나라가 평등하고, 특정 나라를 옹호 혹은 배척하는 것은 차별주의로 인식되기에 ‘애국’은 공감하기 난해한 개념이었다.
문득, 나의 영웅 충무공의 애국은 무엇에 대한 것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왕, 주권, 땅, 백성…… 모두 조선이라는 나라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특별히 그가 죽을 힘을 다해 지키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약하고 어리석고 질투심 많은 왕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가? 결국 얼마 후에 적에게 넘겨질 영토와 주권을 위해 수많은 인명이 제물이 되었다면 정당한 일인가? 애국이라는 명분으로 투쟁하며 보호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일까?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우리의 역사인데 그 시대 그들에겐 서로가 주적이 되어 칼을 휘둘렀다. 같은 나라의 역사를 두고 계백은 가족을 베었고, 어린 화랑의 부모들은 자식의 주검을 안아야 했다. 한시적이고 불완전한 것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건다면 불합리한 도박이 아닌가?
광화문 지하 박물관에서 답이 없는 질문들을 던지며 그와 나누던 긴 대화 끝에, 난 충무공의 깊은 내면에서 새어 나오는 한숨 소리를 들었다. 장수이지만 문과 소양이 풍부해서 마음 속 고뇌를 글로 남겼고, 그 덕분에 시대를 넘어 그와의 소통이 가능한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소매 속엔 적을 이길 병법이 있건만, 가슴에는 백성 구할 방책이 없네……” 그 순간 깨달았다. 그가 구한 것은 조선이 아니라 백성이었음을…… 그의 관심이 나라였다면 적을 이길 병법으로 충분할 일이다. 계백과 어린 화랑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구한 것도 백제나 신라가 아닌 백성이었음을…… 일제 강점기 만주와 한반도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과 독립군들이 지켜낸 것도 백성이었다. 그 백성이 살아 남아 자손을 낳고 그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또 다른 후손을 길러 내도록……이 생명의 줄기를 이어가기 위해 애국자가 필요했고, 위인이 등장했던 것이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왜군 330여척이 조선 수군 13척을 에워쌌다. 중과부적으로 승패가 명약관화한 상황을 뒤집고 이순신은 기적을 일군 명량 대첩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백성들은 환희와 안도 속에 다시 한번 생명 줄을 잡았다. 명량 해전 전날, 9월 15일 난중일기는 이렇게 마감된다. ”이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일러 주었다.” 이순신의 꿈에 나타난 신이면서 인간인 그가 누구였을까…… 조선 백성의 생명 줄을 이어가기 위해 기적의 병법을 알려준 그가 십여 척의 배로 삼백여 척의 배를 상대할 말도 안되는 용기도 주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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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리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