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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驛舍(역사: 역 건물) 옆 공중정원…역사·문화가 흐른다

2020-02-07 (금) 글·사진=우현석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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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코 지나쳐온 서울역…스위스 루체른역을 본떠서 만든 서울역, 광장엔 노년의 독립운동가 강우규 동상, 근대화와 함께 일제강점기의 아픔 간직

▶ 하이라인파크 벤치마킹한 ‘서울로 7017’, 옛 제중원 자리 지키고 있는 세브란스빌딩, 역사 주변엔 시대 발맞춰 현대 건축물도

100년 驛舍(역사: 역 건물) 옆 공중정원…역사·문화가 흐른다

1925년 완공된 구 서울역(경성역)의 외형은 스위스 루체른역을 똑 닮았다. 이는 설계자인 당시 도쿄대 건축과 교수가 루체른역의 설계를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이다.

100년 驛舍(역사: 역 건물) 옆 공중정원…역사·문화가 흐른다

서울역 고가도로였던 ‘서울로 7017’. 1970년에 처음 지어, 2017년에 거듭 났다는 의미를 포괄하고 있다.


100년 驛舍(역사: 역 건물) 옆 공중정원…역사·문화가 흐른다

세브란스 빌딩 야경. 이 자리는 국내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이 있던 자리다.


100년 驛舍(역사: 역 건물) 옆 공중정원…역사·문화가 흐른다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의 동상. 거사가 이뤄졌던 자리에 서 있다.



여행기자를 하다 보니 이래저래 서울역에 갈 일이 자주 생긴다. 열차 시간에 쫓겨 급한 마음으로 찾을 때가 많지만 이따금 시간이 남을 때면 역 근처의 찻집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기차에 오르기도 한다. 업무차 서울과 지방을 오가거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는 작심하고 서울역 인근을 둘러보시라. 구 서울역사는 건물 자체를 비롯해 근처의 벽돌 한 장, 풀 한 포기가 모두 역사와 문화의 산물들이다. 무심코 지나쳐온 서울역 인근의 갈 만한 곳을 소개한다.

1899년은 우리나라 교통 역사에 획을 긋는 한 해였다. 제물포에서 노량진까지 철도가 완공돼 기차가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서울역(구 서울역사) 자리까지 기차가 달리지 못한 것은 한강 다리가 없어 기차가 노량진까지만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년 후, 한강철교(제1한강교)가 건설됐고 마침내 1900년에는 서대문역이 완공돼 기차가 들어왔다. 1905년에는 비로소 지금의 자리에 작은 규모이기는 하나 경성역사가 들어섰다.

1900년의 서대문역은 당시 경성역이라는 이름이었다가 1905년 염천교 부근에 새로운 경성역이 건설되면서 서대문정거장으로 개칭됐다. 염천교 부근의 경성역은 약 10평 크기의 작은 목조건물이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중국 침략의 발판이 될 더 큰 규모의 역사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1922년부터 3년의 공사 끝에 1925년 지금의 자리에 새 경성역을 지었다.

취재에 동행한 유승엽 문화관광해설사는 “1925년에 완공된 경성역의 외형은 스위스 루체른역을 똑 닮았다”며 “역을 설계했던 도쿄대 건축과 교수가 스위스 루체른역의 설계를 그대로 모방해 지은 탓”이라고 설명했다. 유 해설사가 가지고 온 파일 속 루체른역사의 사진을 보니 별도의 설명이 없었다면 어느 것이 경성역이고 루체른역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이상의 소설 ‘날개’에는 주인공이 커피를 마시기 위해 경성역에 가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당시 역 2층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레스토랑인 ‘그릴’이라고 유 해설사는 덧붙였다.

1947년 서울역으로 이름이 바뀐 역사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역과 서부역을 연결해 확장한 국내 최초의 민자역사로 개관했고 2004년 지금의 서울역을 열면서 구 서울역사는 복합문화공간인 ‘문화역서울284’로 운영되고 있다.

근대화의 역사가 깃든 구 서울역사 앞에 있는 수류탄을 든 노인의 동상은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다. 동상이 있던 자리가 바로 의거했던 거사의 현장이다. 1859년생인 강우규 의사는 당시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요새는 환갑이 한참 지나도 노인 축에 끼지도 못한다는 세상이지만 그때는 환갑까지 사는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 하던 시절이다. 연로한 탓에 사건 직후 수사선상에서 배제됐던 강우규 의사는 나중에야 진상을 파악한 일본 경찰들에게 검거됐다.

동상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타면 서울역 고가도로로 올라갈 수 있다. 한때 철거를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던 도로다. “안전성의 문제도 있거니와 역사의 현장인 구 서울역사의 조망을 해치니 철거하자”는 의견과 “50년 된 고가도로도 역사의 일부”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다 뉴욕시가 고가철로를 녹지로 조성한 하이라인파크를 벤치마킹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설계비용 20억원을 걸고 공모해 선택된 안은 네덜란드의 위니 마스라는 건축가 작품이었다. 고가도로 위에는 원형 화단 645개가 있는데 스무 가지 형태의 원형 화단에 228종의 나무와 꽃이 식재돼 있다. ‘서울로 7017’이라는 이름은 1970년에 처음 지어 2017년에 거듭났다는 의미를 담았다. ‘서울로 7017’ 고가도로의 전장은 1,024m로 뉴욕 하이라인파크의 절반 정도다.

고가도로에서 퇴계로 쪽으로 걷다 보면 우뚝 솟은 세브란스 빌딩과 마주하게 된다. 세브란스 빌딩은 제중원 건물이 있던 자리다. 제중원은 1894년 갑신정변 때 칼을 맞은 민영익을 의료선교사 앨런이 살려내는 것을 본 고종이 이듬해인 1895년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설립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이후 1896년 지금의 한국외환은행 본점 자리로 이동, 확장해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부패한 관리들이 병원 운영을 맡으며 많은 문제가 생기자 고종은 1894년 제중원의 모든 권리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했고 당시 책임자였던 미국의 실업가 세브란스의 재정지원을 받아 숭례문 밖 복숭아골로 이전한 후 1904년에 새로 건물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세브란스 빌딩 자리에 있던 세브란스병원 겸 의과대학이다. 당시의 세브란스병원은 한국전쟁 와중에 파괴돼 복구 도중 1957년 연희대와 합병해 연세대가 된 후 신촌으로 병원을 이전했다. 이후 1994년 지금의 건물이 들어섰다. 조선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세브란스 빌딩이라는 현대식 건물이 우뚝 솟아 있고 건물 안 4·5층에 건강검진센터만이 남아 옛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글·사진=우현석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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