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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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유

2020-02-06 (목) 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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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스물을 넘긴 나이에 힘든 입산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 내리는 어느날에 목포 유달산 자락을 넘어 통영 미래사에서 발길을 멈추었다는 법정스님이 생각난다. 그는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을 다 버릴 수 있고 사람마다 생각나는 대로 다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무슨 인생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라면서 수많은 글을 써서 대중들에게 영향을 주고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면서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려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가끔 집정리를 하다 보면 옛날 애들이 쓰던 책, 상장과 플라크, 어릴 때 모습을 담은 사진앨범, 추억이 담긴 장식품, 알록달록한 담요, 여행에서 사온 앙증스런 인형, 손때가 묻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직은 쓸만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빈티지한 시계, 전자제품들도 있다. 버리자니 아깝고 갖고 있자니 짐만 되고…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다 다시 들여놓고… 수년동안 손 안 된 것이면 버리는 게 낫다고 해서 일부는 과감히 쓰레기통으로 던지기도 했다. 잡아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을 깨닫는 나이는 한참 지났는데도 가끔은 아득히 흘러간 젊음을 붙들고 스치는 바람에도 괜히 눈시울을 붉히는 자신에 놀라기도 한다. 삶의 깊이에 의연해지는 세월 덕분에 겉으로는 단단히 익어보이지만 가슴 속은 텅 비어오는 때가 종종 있다.

세상에 무한한 것은 없다. 부와 명예를 강조하는 세상이지만, 정직하고 감사하는 마음 속에 세월의 유산은 값지게 남게 된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더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얼마나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 만족하며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는 요즈음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삶이 정말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지난 연말에는 삭막한 우리부부 가정에 초록기운을 듬뿍 불어넣어주던 손자가 두 주동안 머물다 서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오기 전에 좋아하는 장난감인 트럭과 불자동자, 트렉이 겸비된 자동차세트를 준비해서 선물 했는데 처음엔 무척 좋아하더니 며칠 안되어 “이것들은 너무 오래 되었으니 새 것을 사주세요” 한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그 애와 함께 장난감 가게를 왔다 갔다하고 함께 지내면서 가르치는 것 만큼 나도 배우는 게 많음을 느꼈다. 아직 세 살도 안되었는데 엄마와 아빠가 변호사라 그런지 요즘 애들은 다 그런건지 얼마나 말을 잘 하는지 모른다. 오래되었지만 편하고 멀쩡하다고 생각해서 가구며 커튼을 그대로 갖고 있는 내게 도전감을 준다. 오래 되면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면 삶에 변화를 주고 활력이 되어 젊은 기분도 들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손자는 아직 어려서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만 고집하고 때로는 떼를 쓰기도 하는 무모함도 있지만 욕심없는 그 모습에서 느끼는 게 많다. 남의 눈치를 보기도하고 따지고 재며 합리성을 강조하는 우리의 사고 방식보다 나름대로 의지가 뚜렷하고 솔직하고, 좋으면 천진난만하게 웃을 수 있는 순수함이 때로는 인생에 더 큰 행복을 주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젊은 시절의 모습은 타고난 것이겠지만 노년의 모습은 각자가 살아온 인생의 스타일로 남에게 해끼치지 않고 자유롭고 자신감있게 비추어지는게 좋을 것 같다. 선한 생각을 갖고 아름다운 영혼을 키우는 일이야 말로 노인이 해야할 의무가 아닐까. 아등바등하지않고 손에 쥔 것을 내려 놓는 여유로운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무소유” 와 “버리고 떠나기” 의 가르침을 주신 스님의 덕을 기리어 본다.

<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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