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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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바다] 그는 당신의 서사에 1도 관심 없다

2020-01-27 (월) 신선영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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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실이다. 영혼까지 갈아 부어 쓴 이력서가 읽히는 시간은 무려 3초! 결국은 대학 이름, 알만한 회사명, 숫자 몇 개 볼 시간 정도 겨우 투자하지 않겠다는 거다. 아무리 “제가 이런 역경을 딛고 대단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침 튀기며 설명해봐야 그의 머릿속에는 미처 죽이지 못한 인터넷 게임 속 캐릭터만 왔다갔다 할 수도 있다.
일 년에 쏟아져 나오는 책은 최소 2백만 부로 추정된다. 그 중에 1분이라도 제대로 읽히는 책은 몇 권이나 될까? 대부분은 소각장 신세 아니면 작가의 개인 소장용으로 돌아간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요즘 같은 시국에! 대선거며 북미 정삼회담이며 바쁘게 찍어나오는 헤드라인에, 무엇보다 방탄소년단 오빠가 손편지를 올렸는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쓴 칼럼이 읽기기나 할까?

“누가 우리 이야기에 관심이나 가질까? 우린 그냥 평범한 여자애들이잖아.”

Greta Gerwig의 리메이크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막내 에이미는 평범한 자매 넷이 살아가는 이야기로 출판을 앞둔 둘째 조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1868년, 출판을 앞둔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이 스스로 한 번쯤 던져봤을 만한 질문이다. 지금이야 고전으로 꼽히며 세계 각국 여성들의 연예인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생각해보면 <작은 아씨들>의 주인공은 당시 남자에게 의존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어린 여자들이다. 그것도 어디 귀족 출신도 아닌, 중산층 출신의 빼어나게 예쁜 거나 대단히 성공한 것도 아닌 인간미 넘쳐나는 여성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너무 평범한 이들의 서사에 우리가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세상이 얼마나 당신의 이야기에 관심 없는지 열변을 토한 내게 물어본다면 조금 민망하겠지만, 캐릭터들의 사랑스러움이라 대답하겠다. 사랑스러움이 최고의 콩깍지라고 하지 않는가. 우선 사랑스럽기 시작하면 모든 게 용서된다.

개인적으로 사랑스럽게 느껴졌던 대목은 막내 배스와 에이미가 언니들이 가는 멋진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아쉬움에 상상에 나래를 펼치는 장면이었다. 나이 차이 크게 나는 언니가 있는 나는 이 서러움과 고된 기다림을 선명히 기억한다. 어른 되면 다 시켜준다고 달래는 엄마 품에서 울며 잠들다가 언니처럼 커서 사랑에 빠지면 어떤 기분일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날들 말이다. 나름의 자유를 꿈꾸는 소녀들의 모습이 단연 귀엽다.

사랑스러움은 막내들만의 몫이 아니다. 아빠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긴 머리를 자르고 씩씩한 척하지만 모두가 자는 시간, 머리가 이게 뭐냐고 흐느끼는 조. 가족을 생각하는 예쁜 마음과 예뻐 보이고 싶은 소녀의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을 모습이 선명히 그려지며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녀는 시간이 흘러 어느덧 숙녀가 되었을 때 진취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과 사회에서 기대되는 여성으로 모습 사이에서 여전히 힘들어한다. 매번 용기 있고 정의로운 선택을 해온 그녀지만 여성을 지성과 영혼이 있는 복잡한 존재가 아닌 감정 속에 갇힌 단편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회에 좌절하며 외롭다고 흐느끼기도 한다.

사랑스러움의 비밀은 기다림에 있다고 생각된다. 사회가 억압하는 자아상과 자신이 진정 갈망하는 모습 속에서 갈등하고 넘어지더라도 희망을 놓지 않는 모습, 그 기다림은 우리를 미소짓게 하고 감동하게 한다.

계속해서 사랑스러움을 유지하며 기다려야 할 것이다. 너무나 평범한 것 같은 당신의 서사에 웃고 울며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날을.

<신선영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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